유진영

미술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미지는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시한폭탄을 안고 내달리는 기관차에 올라타 무슨 말이든 덧붙여보는 것, 혹은 눈치채기 힘든 무용한 몸짓을 남기는 것. 웃음도 나지 않는 비이성과 불합리한 현실 앞에서 미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자꾸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미술로 말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시작해본다.

지난해 연말, 벼락처럼 내리꽂아진 사건 앞에 반응하는 여러 모습을 보았다. 각자의 현실과 영역에 따라 모두 다른 방식들로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이 퍽 희망차기도, 재미있기도 했다. 그렇게 즐거움과 자조가 반반 섞인 웃음 안에서 발견한 새로운 민중들의 이미지는 경쾌하고 다층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온갖 너스레와 유머가 총출동한 깃발과 피켓들, 색색의 응원봉 행렬을 보며 누군가는 그저 번지르르한 이미지나 가벼운 제스처가 갖는 휘발성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을 테다. 그렇지만 마음이 크게 동해 시위에 나가 목청을 높이다가도, 때로는 또 다른 현실의 굴레 안에서 방구석 여포처럼 따뜻하게 입만 나불대는 적당한 현실 인간인 나에게 그 경쾌함은 쉽게 지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민중에 관한 가장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1953-)은 『민중들의 이미지』에서 이름을 잃어버리고 무권력과 무언증으로 제시되는 얼굴, 그럼에도 어떤 경우에도 힘을 잃지 않는 얼굴을 민중들의 이미지로 설명한다.1 디디-위베르만은 영화의 단역(figurants)들에 주목하며, 이들을 역사의 민중으로 치환한다. 따로 부여받은 이름은 없지만, 스스로의 역사를 전제 삼아 화면 안에서 일련의 행위를 수행하는 단역들의 존재론이 역사 속 민중들의 몸짓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역사 속 모든 민중은 기록하는 이의 선택을 받은 순간에만 나타났다가, 망각되기를 반복해왔다. 한국 역시 그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 한국 역사에서 ‘민중’이라는 개념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형상화되어왔다. 예를 들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민중은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주체로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사회적 약자들이 저항의 상징적인 얼굴로 나타나며, 그들의 얼굴은 강렬한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민중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억압받고 힘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의 투쟁과 저항은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힘으로 작동했다.

그런가 하면, 21세기의 민중은 좀 더 분산된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민중’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을 넘어서, 다양한 사회적 계층과 인터넷을 통해 연결된 광범위한 존재들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디지털 시대에 민중은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 자체가 새로운 존재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2024년 말 한국에서는 팬덤(fandom)이라는 익명의 다수가 역사의 민중으로 솟아오른다. 결핍 노출과 과잉 노출의 적확한 사례로서 화려한 무대의 밑, 공연이 끝난 후 어둠에서만 거처하며 단 한 번도 유일무이한 개별자로 존재한 적 없던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 무대를 길 위로 옮김으로써 이름과 얼굴을 부여받는다.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획득해낸다. 한 번도 들여다본 적 없던 이들의 얼굴은 경쾌하고, 흥겹고, 가벼우며, 단단하고, 때로는 처절하다.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음식을 나누는 이들은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폭력의 시대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도덕적 원칙이나 상식에 준거하여 행동한다. 그리고 더 가볍고, 더 미시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새로운 민중에 대해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민중미술은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우리 시대의 민중미술을 고민할 때, 우리는 자주 민중미술의 ‘부재’에 대해 말하곤 했다. 이때의 부재는 문자 그대로 한 미술 사조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중’, 혹은 ‘다중’을 하나의 힘으로 응집하는 시대정신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정치적 격동과 대중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중요한 사회 표현 방식으로서 이미지를 활용하는 정치적 예술은 그 이름과 배경을 달리하며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들에 유사한 양상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한국말로 된 고유명사로서 ‘민중미술’은 유신에서 민주주의까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되기까지, 정치·경제적으로 유달리 지난한 현대사를 가진 한국인들에겐 더 넓고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

그간 나에게 민중미술은 특정 시대를 지난 남성성의 전유물이자 동시대의 미감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여지기 힘든 형식과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조직적인 무력시위로 투쟁을 논할 수밖에 없던 시기가 있었다. 민중미술은 그때 태어났고, 자라났으며, 퍼져 나갔다. 1970년대 말, 이상한 안락함을 남긴 오랜 독재가 끝나고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회 각층에서 저항의 움직임도 거세졌다. 민주화 운동의 물결과 함께 태어난 민중미술은 현실과 유리된 폐쇄적인 기존 미술계의 구습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역사에 반응하고자 했다. 사람들을 응집시킬 더 강력하고, 더 처절한 수단을 필요로 했던 활동가들은 머릿속에 각인될 수 있는 이미지의 강력한 힘을 빌리려 했고, 예술가들은 그러한 시대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민중미술을 전개했다.

민중미술의 형식적 특징은 당시 사회의 요구와 맞물려 발전했다. 언뜻 생각하기에도 꽤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상이 있다. 현실을 정확하게 지시하는 구체적인 이미지, 용솟음치듯 역동적인 선, 강렬한 원색의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캔버스를 탈출하여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기를 자처하는 존재 방식들. 이들은 대중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기능했다. 그러나 어떠한 우회로도 택하지 않고, 오로지 직접적으로만 말하는 민중미술의 발화 방식은 21세기의 나에게는 큰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혹은 내가 생각하는 미술의 방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형식을 넘어서서, 민중미술을 하나의 태도로 인식하기로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할 것도 같다. 민중미술은 그 시대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예술이 정치적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민중미술이 특정한 시공간을 공유하며 그 순간에만 작동하는 힘을 발휘해 이른바 민중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라면 일관된 형식을 갖추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특정 순간과의 만남을 통해 그 이미지가 모종의 정치성을 갖게 되는 일이다. 1987년의 ‘한열이를 살려 내라’처럼, 광장의 ‘촛불소녀’와 ‘응원봉 소녀(?)’처럼 말이다.

다시 디디-위베르만의 말을 빌려 오늘날의 민중미술을 상상해본다. 과거보다 더 모호하고 분산된, 혹은 무력화된 민중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어떻게 형상화될 수 있을까. 응원봉이 어디에 놓이는가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것과 같이 사회 안에서 스테레오타입화 되었던 이미지는 특정 순간과 만남으로 인해 새로운 형상을 얻게 된다.

거의 모든 것의 과잉으로 인한 지금의 가속사회에서 이미지 역시 생존을 위한 새로운 습성을 얻었다. 바로 ‘매끄러움’과 ‘가벼움’이다. 이는 단순히 이미지가 많아지는 것이나 두터운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디지털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생성되고, 소비되고, 확산/재생산됨에 따라 의미를 거듭해서 갱신하는 것에 가깝다. 하나의 이미지는 반복되고 왜곡됨에 따라 그 의미가 확장되거나, 혹은 정 반대의 의미를 얻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지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상은 단순히 '전달'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가 새로운 사회적 맥락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그것이 다수의 익명의 목소리로서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미치게 되기도 한다.

폭력과 비폭력, 날것과 매끄러움, 보수와 진보. 여러 대립항이 스친다. 더 광범위한 확산을 위해 우습게, 매끄럽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우리 시대의 민중미술로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손에서 손을 타고 인터넷 도처를 떠돌아다니며 오역되고 확산되는 모든 이미지들은 그 안에서 대립과 충돌, 화합이 상보적으로 작동하는 장이 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전통적인 민중미술의 형식이 지닌 '강렬함'보다는 더 가볍고 유연하게 변형되며, 때로는 풍자나 유머를 통해 대중들에게 시나브로 영향을 미친다.

매끄럽고 가벼운 것은 견고한 장벽을 무너뜨리고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틈새를 열어 준다. 같은 것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하고, 더 많은 대상을 이야기의 장으로 끌어오는 것, 논의되지 않았던 것에 주목하는 것, 불확실한 틈을 벌려 다음을 상상하는 것. 오늘날의 민중미술은 더 이상 한정된 형식이나 문법을 갖는 것에 갇히지 않고, 유동적이고, 재생산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미지 운동’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기간 내내 온갖 사건들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몇 주 전에는 체포가, 얼마 전에는 법원에 폭동이, 구속과 변론이 이어졌다. 이렇게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쓰는 글에는 도무지 두서가 없다. 그곳에 남는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주황색 풍선들을, 밤새 눈 내린 거리에 모여 앉은 은박지 더미들을, 기꺼이 본인의 폭동 행각을 생중계하여 고스란히 증거로 넘겨준 아둔한 녹색 점퍼를, 모든 목소리가 뒤섞여 중층의 의미를 갖게 된 하나의 광장을.

다시 한번,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 정확하게는 이미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노충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여문주 옮김(현실문화A,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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