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경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숱하게 넘어지며 성장한 어른들은 넘어지면 상처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서 환부를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인다. 그러나 아이들의 경우 다르다. 처음 넘어진 아이들은 놀라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사회적인 위험 상황에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위기 상황이나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12월 3일 뉴스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자 마지막 계엄으로 자신이 잃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국회로 뛰어갔다. 그러나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계엄을 처음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국회로 뛰어갈 수 있었을까.
그날 밤 계엄령이 해제되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까지 여의도 길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전의 집회와 다르게 사람들은 재치 있는 깃발과 아이돌 응원봉을 흔들었고, 아이돌의 노래들이 스피커에 울렸다. 최근 집회에 가장 많이 참여하고 있는 2030 여성들은 마지막으로 비상 계엄이 선포된 1980년대 민주항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얼버무리지만 ‘다시 만난 세계’의 반주에 손을 흔드는 안무를 따라 하는 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혼란스러운 사태에 어떻게 정치적인 문제와 심각성을 감각하고 길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을까?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정치적인 위험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든, ‘다만세’를 부르든, 광주에 모이든, 여의도에 모이든, 남태령에 모이든 사회적 안건에 대해 시민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는 것을 ‘집회’라 통칭한다. 대통령의 내란이든, 정부의 폭력이든, 수학 여행을 떠났던 학생들을 구조하지 않은 정부이든, 어떠한 안건에 따라 모였든 우리는 이것을 모두 ‘집회’라 부른다. 이처럼 각기 개별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하나의 단어로 보편화하는 언어는 은유로 작동한다.1 언어는 때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추상화해버리고, 때로는 중요한 문제들의 과녁을 정확히 조준하지 못하고 조금 빗겨나가거나 너무 뭉뚝한 화살을 쏘아버리고 만다. 그러나 동시에 은유로 소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너머의 것을 나의 것이라 여길 수 있다.
각기 다른 몸을 지니고 다른 생애를 살아왔지만 삼삼오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시민’이라 한다. 여성도, 성소수자도, 농민도, 장애인도, 남자도 모두 ‘시민’으로 칭한다. 20대 여성으로 공공화장실에 갈 때 느끼는 일상적인 공포나 일상적인 대화에서 여성을 얕잡는 표현이 주는 불쾌감을 호남과 영남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50-60대 남성이 알기 어렵다. 역도 마찬가지로, 뙤약볕에서 노동을 하는 경험도, 강수량에 전전긍긍하거나 수확량이 몰려 밭을 엎는 좌절감을 수도권에서 자라난 20대 여성이 경험적으로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은유로 소통하고 감각하는 인간은 각자의 몸과 경험에 갇혀 살지 않는다.
2024년 12월 3일 이전 마지막 계엄령은 1980년에 5월 17일에 선포된 계엄령이었다. 이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다음날 군에 사살당했다. 그날은 몇 개의 단어로 서술될 수 없는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이지만 우리는 ‘광주’, ‘5.18’, ‘민주항쟁’, ‘국가적 트라우마’ 등의 단어로 그날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다른 이름들을 부른다. ‘4.3사건’, ‘용산참사’, ‘세월호’, ‘이태원’...… 한강은 ‘광주’가 되풀이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2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은 광주와 용산만이 아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보다 ‘다만세’가 익숙한 내가 목도한 고립은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났다.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고등학생들이 탄 배는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고, 사람들은 뉴스에서 배가 기우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학생들은 배 안에서 장난삼아 배의 기울기를 물었고, 학생들이 찍은 동영상도 실시간으로 공유되었다. 빠르게 확산되는 이미지나 동영상과는 다르게 그들이 몸을 실었던 세월호는 고립되었다. 천진하던 학생들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몇 해 동안 유가족들과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진위를 밝히고자 했지만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답변은 없었다. 이듬해 무능한 정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중 시위를 하던 농민은 생을 잃었다. 사람들은 한겨울에 광화문에 나와서 걸었다.
1980년 전국적으로 확대된 비상 계엄령을 내려 군이 사살한 광주의 학생들과 2014년 정부가 구조하지 않은 안산의 학생들은 다르다. 학생들 하나하나의 얼굴, 그들을 저버린 얼굴과 그들을 사살하라고 지시한 얼굴, 그들을 둘러싼 사건의 양상과 그들이 살던 시대는 다르다. 그렇지만 두 사건은 한 사회의 시민으로, 인간으로 잃지 말아야 했던 것이 고립되고 힘으로 짓밟힌 것이었다. ‘국가적 트라우마’, ‘국가의 재난’, ‘정부의 폭력’과 같은 문구로 두 사건은 은유된다. 은유는 이러한 사건 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타인 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2014년에 나는 대학에 입학했고, 4월 1일에는 만우절을 맞아 친구들과 교복을 입고 다니던 고등학교에 장난을 치러 갔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매일 입던 교복은 피부처럼 편했고, 성인으로 지내는 것보다 교복을 입고 지내던 것이 더 익숙했던 4월에 단원고 학생들은 배에서 목숨을 잃었다. 매년 4월쯤이면 찾아오는 만우절과 벚꽃은 거짓말 같았다. 학생들이 그 배에서 나오지 못한 것도, 학생들의 나이가 그렇게 멈춘 것도,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살아서 나이를 먹고 있는 것도. 답답한 마음에 시위에 가면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마치 학교에서 출석부를 부르던 것처럼. 하나하나 호명된 이름은 내가 교실에서, 강의실에서 마주할 수도 있었던 이름들이었다.
세월호에 탑승한 단원고 학생을 살아생전 만나지 못해 나는 개인으로서 단 한 명도 잃지 않았지만, 내가 마주했을 수도 있는 이름들 앞에서 나는 자꾸만 누구를 잃은 것 같았다. 불과 몇 개월 차이로 고등학생 시기를 빠져나온 나와 달리 이를 더 가까이 느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안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그즈음 수학여행을 다녀온 다른 중고등학생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생존 수영이 정규 교육 과정에 도입되어 수영을 배운 학생들, 집 밖을 나서는 학생들이 매일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보호자들. 우리가 가르는 물과 우리가 내뱉는 숨에는 그러지 못했던 사람들의 몫이 담겨 있다.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빚진 숨을 쉬고 있다.
광주의 한 야학 교사였던 박용준 씨는 광주의 YWCA를 지키다 사살당했다. 그는 그의 일기장에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 적었다. 그가 목도한 죽음과 그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을 그가 구할 수 있는지, 그가 살아있던 현재가 이미 벌어진 일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을 것이다. 한강은 두 질문을 뒤집어 다음과 같이 썼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3 나보다 먼저 떠난 당신께,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떠난 당신께 빚진 채 들숨과 날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살은 더 이상 내 몸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보다 넓은 표피로 세계를 감각한다. 그것이 하물며 내 것이 아닐지라도.
1 개별과 보편의 관계를 고려하면 은유법보다 제유법이 더 적합한 수사법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제유법이 공간적인 인접성에 따라 일부로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이 그러하다. 가령, 주전자가 끓고 있다’ 라고 이야기할 때 끓고 있는 것은 주전자가 아니라 물이지만, 물을 담고 있는 주전자가 공간적으로 인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한다. 이와 같은 제유법에는 물과 주전자 사이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어쩌면 조금 빗겨나가거나 ‘뭉뚝한 화살’은 이 간극을 지시한다.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와 윤석열을 규탄하는 집회 간의 차이를 ‘집회’라는 단어는 표현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 상술할 바와 같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별과 보편 간의 공간적 인접성 및 그의 차이 뿐만 아니라, 유사성에 입각한 전이다. 은유는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다고 표현함으로써 둘 간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표현법이다. 개개인간의 차이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일어났지만 유사성을 발견하고 동일하다고 표현할 때, 보다 확장할 수 있는 인간의 감각 범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며 이를 은유법을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2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207.
3 Han Kang – Nobel Prize lecture in Korean. NobelPrize.org. Nobel Prize Outreach 2025. 2025년 3월 4일 접속,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