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일기

김여명

2024년 12월 이후 절망과 절망하지 않는 상태를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벌써 한 달 하고도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시위에 참가하며 느낀 몇 가지 부끄러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일기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인식적 틀이 내게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생각이 부족한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양해를 부탁한다.

돌아갈 일상이 없는 자들에게

촛불 시위의 가장 큰 역할은 공론장에 서서 자유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나와 같은 평범한 시민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온 사람, 경상도에서 온 사람, 남자, 여자, 노인, 아이, 노동자, 주부, 변호사 할 것 없이 모두가 무대에 올라와 평등하게 발언 기회를 가진다. 나 또한 그들의 발언에 심정적으로 공감하여 구호를 따라 외치기도 하고, 참사에 대해 애도의 마음으로 잠시간 묵념하기도 한다. 그러다 누군가 무대에 올라와 말한다. 평화로운 일상을 반드시 지켜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빠른 정상화에 힘써 달라고. 내게는 그런 일상, 반드시 지켜내고 돌아가고 싶은 일상 같은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상은 무엇인가? 지금껏 우리의 일상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구획되는 시간표가 아니었나? 그런 게 과연 수호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Normie’라는 말은 직역하면 ‘평범한 사람’인데, 이 말은 사회로부터 기대되고 요구받는 일인분의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을 충실히 수행하며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고 주류의 감성을 따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 Normie는 소수의 ‘너드’ ‘긱’ 혹은 ‘덕후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별걱정 없이 사는 사람 혹은 ‘머릿속이 꽃밭’인 사람, 사회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Normie를 욕설 또는 멸칭으로 쓰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이들의 ‘정상적’인 삶을 부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기, 질투, 나아가 저주하거나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 ㅡ 앤절라 네이글, 『인싸를 죽여라(Kill All Normies)』, 김내훈 옮김(오월의봄, 2022), 전자책.

특정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12월이 오기 전까지, 내가 참여하고 있는 한 공동체에서 우리는 모두 동년배에 남성과 여성이 적절히 섞여 있었고, 그 안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었다. 일이 발생하고 막 한 주가 지났을 때 즈음, 여의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매일 시위가 이어질 때, 공동체 구성원 중 한 명이 내게 토요일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시위에 간다고 대답했다. 돌아온 답변은 “날 추운데 고생한다”와 “대단하다” 두 가지였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 주 토요일에 서초동에 위치한 공동체 리더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다시 한번, 나에게는 ‘돌아갈 일상’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깨닫는다. 어쩌면 나는 내 삶의 관광객처럼 특수한 이벤트만을 갈구하고 일상은 관망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2024년 12월 4일 오전 여섯 시경, 미국 뉴욕주 뉴욕시 힐튼 미드타운 호텔 앞에서 한 보험사의 CEO가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루이지 맨지오니(Luigi Mangione)는 체포될 때 고스트 건, 소음기, 마스크, 선언문 3장, 모노폴리에 쓰는 가짜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총알과 탄피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Delay, Deny, Defend, Depose. 미국 보험사들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기 위한 전략 키워드라고 한다. 맨지오니는 유복하게 자랐다. 의료 민영화 관련한 뉴스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맨지오니는 자신의 사적 제재가 “기생충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냉혹한 살인 사건에 미국 현지의 반응은 의료 보험의 엿같음에 공감하거나 맨지오니의 외모가 잘생겼다 두 가지로 양분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적 제재에 동의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맥도날드에서 해시브라운을 먹던 그에게도 돌아갈 일상이 없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출근을 하고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은 뒤 귀가해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그런 일상. 주말이면 친구들과 모여 맛있는 것도 먹고, 그간 못 나눈 이야기들을 나누며 가끔 싸우고 다투기도 하지만 실존적인 의미를 상실할 정도는 아닌……. 정상성에 대한 내 판타지가 가미된 결과겠지만, 그런 일상이 내게는 없다. 나는 가급적이면 계속해서 싸우고 싶다.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나의 열망일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열등감이기도 할 것이다. 일상을 돌려 달라고 외친 한 시민에게도 사실은 일상 같은 게 없을 가능성도 있다. 서초동에 거주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행복을 건네는 것은 아닐 것처럼.

이야기가 너무 자기 연민 쪽으로 치닫는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뒤늦게 2021년부터 진행 중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와 타임라인 너머로 자주 접해 왔지만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용주골 시위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소수자의 정치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외면해 왔던 것을 외면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페미당당의 심미섭이 여의도 시위에서 발언할 때도 현장에 있었다. 여성 혐오를 멈추고 소수자와 연대하자는 메시지의 발언이 진행될수록 내 옆에 있던 남성의 한숨 소리가 잦아졌다. “저러니까 욕 먹지, 여기까지 그런 걸 가지고 오고 싶나.” 나의 주변인들이 문화예술계 사람들로 채워지는 만큼 이런 말을 들을 기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타인의 목소리로 그와 같은 말을 들었다는 충격도 잠시, 내 마음은 곧바로 한숨의 당사자를 향한 혐오감과 적대감으로 가득해졌다. 시위 현장에서 전장연 발언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다그치듯 말씀하시는 아주머니를 촬영한 클립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일, 혹은 그 반대라 하더라도 너무 강렬하고 무거운 감정을 버텨내기 힘들다. 그런 일에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도 아깝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 모든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어떤 일이든 가급적이면 시니컬한 입장을 취하는 데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다고 뭐가 되겠니.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사실 여기에는 모종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그럴 힘이 내게 있지도 않고. 개인적인 삶조차 꾸려나가지 못하는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나라를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내 기분을 바꾸는 건 비교적 쉽다. 만성적인 우울에 익숙해진 만큼 우울을 모르는 척하는 일에도 능해진 스스로가 부끄럽다……가도, 다시 그 부끄러움마저 모르는 척을 해 버리면 그만이다.

무용한 나의 일

이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기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나와 동년배에 있는 미술계 종사자들의 공통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 사회에 나왔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잘한 것은 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분석하고 여러 가지 이론적 틀을 가져다 붙이며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무용하게 느껴지는 심각한 절망의 시점에 이르렀음을 고백한다. 한 손에 절망, 다른 한 손에 패배감, 머리에는 빚을 이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낄낄거리면서 시답잖은 농담으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축소하고 모르는 척한다. 이것은 나 개인의 일이 아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우리는 행사를 미루거나 취소하고 스토리에 촛불 이모지를 붙여 업로드하지만, 기관과 제도 밖에서 시국선언문을 함께 작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론장마저도 부재한다. 이 무력감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또다시 무엇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나아가서는 개입하는 일 자체가 두렵다.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인가?

‘잘못된’ 인간들의 얼굴

시위 현장이 여의도에서 광화문으로, 남태령으로, 마지막으로는 한남동으로 옮겨지면서 부득이하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면할 일이 많아졌다.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상은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쪽에는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중노년층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 용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대안우파’로 대표되는 청년층이 있다. 매주 토요일 광화문으로 가는 길을 막는 원인인 태극기부대의 집회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고 할렐루야와 멸공을 함께 외치며 하나로 결집할 것을 강조하며 국가 원수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그들의 지나친 진지함은 때때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한편 미국의 한 커뮤니티 사이트 4chan에서 시작된 대안우파의 움직임은 기독교 중심의 보수주의와 좌파의 뱀파이어성에 반기를 들고 온갖 혐오를 ‘밈(meme)’으로 유포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농담으로 격하시킨다. 태극기부대와 다르게, 모든 형태의 규율을 거부하는 위반과 저항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모든 것은 장난이자 농담거리이다. 심지어 남의 죽음까지도.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정치 신조마저 농담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테러리스트들은 ‘진지한’, 즉 시민적이거나 정치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정부가 아무리 머리를 쓰더라도 그들의 서사를 밝혀내는 것은 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진지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도를 파악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테러리스트들의 동기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그들의 행위[행위의 원인]를 더욱 불분명하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행동 원리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 ‘진지한’ 것과 ‘경박한’ 것 사이의 경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모든 정치적 행위의 배후에는 정치적 의사와 결정이 있다는 전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ㅡ Hiroki Azuma, Philosophy of the Tourist, trans. John D. Person(Falmouth: Urbanomic Media LTD, 2022) 24. 국문은 직접 번역.

둘 중 어느 쪽이든 그간의 나는, 앞서 짚은 것처럼 시니컬한 태도로 이들을 대해 왔다. 그들이 아무리 혐오를 자행해 봤자 그 혐오가 어떤 종류의 효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건 그들이 생각만 하지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옮길 정도로 진지하지 않기 때문일 거라고, 그들의 신조는 진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만의 헛된 상상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문제가 되는 일부 ‘루저’들의 발악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한남동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들의 얼굴은 그저 평범하다. 그런 평범한 얼굴로 자유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외친다(수호를 위해 경유하는 방법은 다를지라도). 돌아갈 일상은 없지만 어쨌든 비교적 평범한 축에 속하는 내가 시민인 것처럼 그들도 시민인 것이다. 이 간단한 사실은 나에게 엄청난 무력감으로 돌아온다. 탄핵 찬성 시위는 이쪽으로 가시구요, 반대 시위는 저쪽으로 가셔야 돼요. 사람들이 가는 방향이 갈라진다. 이 내전은 내가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미지1) 영화 〈시빌 워〉 중 한 장면. 한 미국인이 다른 미국인에게 너는 어떤 종류의 미국인이냐고 묻고 있다. 출처.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그들과의 대립인지 특정인과의 대립인지 헷갈린다. 내가 시니컬한 태도로 뭔가 바꿔 보려는 사람들을 비웃은 것은 부끄럽게도 사실이지만, 실질적인 위협 속에서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상식이 깨어진다. 이제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되돌아보며 거울을 본다. 내 얼굴에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살핀다. 구분이 어려운 것도 어려운 것이지만 그걸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혐오의 정서를 방관한 결과이다.

그런 한편에는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건 당일의 충격에 못지않게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 날에도 세계가 아무 문제 없이?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장을 보고, 일을 하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나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지금 이렇게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그렇다고 헌신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는 의문이 따라붙는다. 하루는 시작되는데 일상은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방주를 발견할 수 있을까? 거기엔 누가 타게 될까? 거기서도 나는 여기로, 너는 저기로, 그는 거기로, 그들은 다른 곳으로…….

“청년 대안우파, 인셀, 베타메일 멘털리티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극우와 혐오의 망동들(...)뿐만 아니라 그 반대 지점에서 리버럴 진영의 탈정치화 및 전복과 위반의 문화정치학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 그리고 반위계적 네트워크 정치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의 역효과를 지적하면서 진보 정치의 뼈아픈 반성을 (...)” ㅡ 앤절라 네이글, 같은 글,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