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안의 온갖 세계

김지율

1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을 때 나는 국회의사당을 향하는 버스를 올라탄 참이었다. 여의도역에 도착해 보니 이미 열기가 한차례 휩쓸고 간 분위기였다. 사람들을 거슬러 가면서는 그들이 손에 쥔 피켓과 깃발, 전봇대에 묶인 플래카드, 허술하게 제작된 관짝을 눈에 담았다.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는 현장으로 막 들어선 나에게 그 사물들이 안도감을 줬던 까닭이다. 아직 많은 말이 있다는 느낌. 그 말들을 읽고 따라가며 동시에 약간은 홀가분해진 마음이 진동하기도 했다. 그건 문구 안에 ‘나’라는 존재가 조각나서 얼마간씩 들어가 있다는 감각이었다.

이 글은 나부끼던 피켓과 깃발을 다룬다. 생각해 보면 이것들은 늘 광화문을 지키고 있었다. 자유대한민국을 부르짖으며 애국을 외치는 사람들이 언제나 (아마 지금도) 그곳에서 태극기, 성조기를 휘날리며 박정희와 박근혜를 그리워하지 않았나.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모습은 다음 장면이 기대되지 않는 스틸 이미지로 굳어졌는데,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왜 어떤 문구는 의미를 획득하고 어떤 문구는 그저 이미지로만 남을까?

2

힘 있는 정치적 상징이 되기 위해 피켓과 깃발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요소가 있어 왔다. 직설적인 메시지, 리듬감 있는 문구, 명령조의 어미, 강력한 시각적 대비, 적절한 아이콘의 활용 등. 이러한 요소는 문제 상황을 명료히 틀짓고 단일한 목표를 겨냥해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데 탁월하다. 추측건대, 1919년 3·1운동 현장의 태극기는 어떤 말도 필요 없이 모든 마음을 아우르지 않았을까. 태극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식민 지배 역사에 단번에 입장시킬 강렬한 이미지로서 모종의 결연함을 차오르게 만드는 것 같다. 구호는 줄줄이 이어진다. 1960년 4·19혁명, “不正選擧(부정선거) 다시 하라” “學生(학생)의 피에 報答(보답)하라!”.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계엄령 철폐!”,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1987년 6월 민주항쟁, “한열이를 살려내라!”, 그리고 쓰러지는 그가 거칠게 새겨진 판화까지. 상황에 따른 분노와 열망은 고스란히 구호가 되었다.

이 계보에 새로 기입될,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우리가 마주한 피켓과 깃발은 다음과 같다. 피켓의 경우: “페미니스트가 요구한다 윤석열은 물러나라”, “퀴어/여성/청소년은 언제나 광장에 있었다”, “민주주의의 시작은 퀴어/장애인권에서부터” “”. 깃발의 경우: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깃발문구추천받습니다”, 검정, 하양, 초록 줄무늬 배경 위에 그려진 붉은 삼각형, “전국멜로디협회”. 예시로 든 피켓은,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 연대에서 공유한 규탄 메시지다.1 이들은 안팎의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피켓 디자인 파일 모음을 구글 드라이브를 통해 무료 배포했다. 누구나 원하는 피켓 문구를 요청할 수 있었고 제작하여 배포할 수 있었으며, 영리적 목적이 아니라면 2차 수정, 재배포가 가능했다.2


(이미지1)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 피켓 디자인 구글 공유 드라이브, 출처.

한편, 각각의 깃발은 그 주인과 의도를 특정하기 어렵다. 실재하는 연합인지 의문스러우며, 원한다면 언제든 일시적 가입과 탈퇴가 보장된 듯 보였다. 어쩌면 개인의 자기소개에 가까운 소위 ‘아무 깃발’은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부터 출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집회에 모인 이들이 특정 세력에 의해 동원된 선동꾼으로 몰리자 자신이 ‘순수한 시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깃발을 올린 것이 ‘아무 깃발 대잔치’의 시작이었다.3

이들 피켓과 깃발은 어느 쪽이건 과거의 그것과 달라 보인다. 나는 이 차이가 오래된 프로파간다의 형식을 따돌리거나 훔치면서 자기 이야기를 날려 보내는 실천에서 온다고 말해 보고자 한다.

3

17세기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된 구조물 또는 소규모 군사 부대를 뜻했던 피켓은 시대를 건너 19세기 사회 운동의 시위 도구가 된 후, 줄곧 집단적 비전을 강하게 투사하며 ‘우리’를 하나로 묶어내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시대와 상황의 맥락이 있겠으나 당시의 피켓 문구는 꽤 권위적으로 느껴진다. 그 문구를 쓴 몸들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일까? 개별의 몸들이 기입되지 않은 피켓은 절대적이고 단일한 주체를 상정하는 듯하고, 그런 점에서 근대적 언어에 가깝다. 그러나 계엄 이후 피켓 안에는 서로 다른 몸의 자리가 마련된 듯하다. 이는 개별의 차이를 일시적으로 무효화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그렇게 탄핵이라는 상황 밖에 이미 있던 긴급한 요청과 욕망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다. 복수의 화자(필자)들은 피켓 안에 자리 잡고, 손에서 손으로 배포되거나 링크를 통해 공유되며 불특정 다수에게 다다른다. 엇비슷한 문구들은 이쪽과 저쪽에서 산발적으로 읽히면서 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역사(또는 집회)를 온갖 곳으로 끌고 간다. 페미니스트? 퀴어? 탈시설장애인? 성노동자? 이주노동자? 그게 다 뭔데?

그리고 깃발은? 성급하게 말하자면 그것들은 어떤 정치적 목적도 없어 보인다. 바람에 휘날리는 탓에 인쇄된 문구의 각 음절은 마구잡이로 조합되기까지 한다. 의미를 전하지 못하는 깃발은 광장에서 무엇을 하는가? 최선을 다해 낙관적으로 답해 보고 싶다. 깃발은 이전에 이름 붙여지지 않았던 행위, 사건, 상황에 이름 붙이는 행위(naming)다.4 그러니까, 깃발은 아직 시스템에서 공식화(언어화)되지 않은 세계를 느닷없이 열어낸다. 독자는 예상치 못한 쟁점으로 단번에 끌려간다. 내가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 깃발을 보고 생태계의 야생적 회복을 위한 리와일딩(rewilding) 운동 또는 동물권 이슈를 다루는 단체로 착각한 것처럼 말이다(알고 보니 ‘야맘협’은 303명의 팔로잉을 거느린 엑스(X) 유저였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소 순진해 보이고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이 명명법은 공식화된 체계에서 익숙한 구조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기존 체계에 포섭되기보다 긴장 관계를 맺으며 목소리를 낸다. 이 목소리는 규범적인 언어에 부딪히고 튕겨 나오면서 관습적인 세계와 결별한다. 어떤 피켓은 “국민을 개, 돼지로 아냐”는 어느 정치인의 발언에서 비인간동물 혐오에 대해, 어떤 깃발은 ‘미쳐 버린’ 대통령이라는 프레임 안에 녹아있는 장애인 혐오에 대해 문제시한다. 한뜻으로 모인 일시적 공동체 내에서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억압이 계속해 쟁점화되는 것이다. 얼마나 어디까지 누구를 무엇을 존중해야 하는 걸까? 이 질문은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대답 역시 ‘함께’라는 환상을 산산조각낸다. 그러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끝내 언어를 다시 쓰려는 이상한 사람들이 매주 광장으로 향한다. 두 손에 피켓과 깃발을 쥐고서.

이쯤에서 극작가이자 페미니즘 이론가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1937-)의 논의를 통과해 피켓과 깃발의 기술을 보충해 보자. 1975년 발표한 「메두사의 웃음(Le Rire de la Méduse)」과 「출구(Sorties)」에서 그녀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쓴다. 식수는 위계적인 이항대립항으로 구성된 이성-남성중심주의의 상징체계에 덤벼들고 산산조각 내기 위해 여성이 여성을 쓸 것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여성적인 것은 무엇이며 여성적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식수에게 ‘여성적’이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표지다.5 우리는 필연적으로 언어 속에 존재하며 말을 없앨 수 없다. 다만 구조 안에서 언어가 의미화되는 과정에 끼어들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멸칭이었던 ‘퀴어’를 전복적이고 해방적인 가능성의 언어로 전유한 테레사 드 로레티스(Teresa de Lauretis)처럼.6 그러므로 문제는, ‘여성’이라는 언어에서 어떤 특질을 발견하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과 관계 맺을지에 있다. 식수에게 ‘여성적’이라 함은, 미지의 몸들로 스스로를 열어젖히며 그 몸들의 욕망 각각을 복수적으로 존재하도록 두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은 피켓에 등장하는 무수한 몸들의 자리, 다수결의 원리에서 이겨본 적 없는 이들의 자리로 변질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그 특질의 바탕이 되는 여성의 성적 고유함도 몸으로서 광장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식수에 의하면, 여성의 욕망은 페니스 주위를 맴도는 남성의 그것과 달리 곳곳에 퍼져 있다. 따라서 여성의 몸은 “하나하나가 전체인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체”7다. 중앙집권화되지 않은 여성의 육체는 부감으로 촬영된 뉴스 화면 속 집회의 꿈틀거리고 있는 몸들의 집합으로 연장된다(그 집합은 더 이상 명쾌한 부분들의 조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 특질을 쓰기의 방법론으로 끌어들이자. 글쓰기의 여성적인 실행은 어떤 모습을 띠는가. 그것은 스스로 억압해 온 ‘나’와 타자를 자신 안에 들이면서도 각각의 차이를 하나로 뭉쳐내지 않는 태도를 조건으로 삼는다. 그 조건 외에, 식수는 구체적인 형식을 이론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형식을 상상해 볼 수 있을 법한 말들을 곳곳에 남겨둘 뿐이다. 그 말들을 얼기설기 엮으면 이런 것이다: 여성은 육신을 써야 한다. 검열되어 온 육체에 무의식적으로 쌓여 온 의미를 팽창하게 둬라. 이 팽창은 규칙과 코드를 부수는 언어, 통사 구조를 휩쓰는 언어, 결코 중단되지 않고 울림을 품은 언어가 된다. 훔치면서-날려 보내는 것! 그것이 여성의 동작이다(불어의 동사 voler는 ‘훔치다’, ‘날아가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미 구축된 제도의 규칙을 도둑질해서, 의미를 따돌리고 날아가라.

혹여나 시적 은유 또는 형식 미학적 접근처럼 느껴진다면 피켓과 깃발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문자 그대로 훔치고, 날아간다. 근대적인 프로파간다의 형식을 탈취해, 코드화된 문구 위에 온갖 목소리들을 얹고 섞고 새긴다는 점에서. 권위적인 상징 문법을 따르는 척하며 농담하고, 그것의 허구성을 마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들은 흩어지고 나부끼고 촬영되고 업로드된다. 그 이미지를 다시 훔쳐서 타래가 이어진다. 다시 말들이 불어난다.

4

이 와중에 여성적 글쓰기라 일컬어지는 몇몇 텍스트와 견주어 이 글의 주장을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식수의 다른 저작 『아야이! 문학의 비명(Ayaï ! Le cri de la littérature)』 또는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의 『딕테(DICTEE)』 같은 텍스트는 얼마나 난해한가. 문장은 문법적으로 어색하거나 동음이의어를 사용해 뜻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고, 여러 장르의 레퍼런스와 형식을 인용, 배치하면서 독자의 머릿속에 완결된 서사가 짜이지 않도록 만든다. 내밀한 개인사를 맥락도 없이 던진다. 그 이야기는 아주 먼 과거로 이어지기도 하며 독자의 현재를 관통하기도 한다. 의미는 멈춰 서지 않는다. 그에 반해 피켓과 깃발의 언어는 얼마나 명료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여성적 ‘읽기’를 시도하자고. (식수의 표현을 훔쳐서) 읽기의 여성적인 실행을 정의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아마 이런 모습을 그려 보면서: 여기저기 펼쳐진,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문구들 혹은 같은 문구지만 모두 다른 모양의 피켓 더미 안에 있기.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없는 이들을 찾기. 깃발 속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연합들에 마구잡이로 가입하기. 그러다 느닷없이 반기 들기. 여성 인권에서 장애 인권으로, 하청노동자로, 팔레스타인 국기로, 뛰어넘기. 끊어지지 않는 소리를 듣기. 그러다 훔쳐 말하기. 쓰기. 당신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남인지에 대해. 그럼에도 말하기. 날려 보내기.

5


(이미지2) 2024년 12월 28일의 광화문, 직접 촬영.

여기까지 쓰고 집회에 나간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 말들이 내게 최선일지 질문했다. 개인적인 문제로 나는 현장에 자주,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의문을 접어두기로 한다. 아주 긴 싸움들이 곳곳에서 이어져 왔음을 안다. 그리고 그 싸움 바깥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이렇게 말해 왔다. “선생님 뭐 이런 행사 하는 데 와가지고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만 받지. 내가 마이크를 드릴 테니까 이 마이크로 할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조용히 하세요.”8 그러나 다수결의 논리에서 튕겨 나오는 말과 행동이 만드는 긴장 덕분에 아직 세계가 망하지 않았음을, 팽팽하게 이어져 왔음을 역시 안다. 그러니 우리는 현장이건 지면이건 어디로든 나서서 너무 다른 서로를 말하고 듣자. 그곳에서 서로를 배우고 훔치면서, 그리고 얼마간의 ‘나’를 도둑질당하면서 손에 꽉 쥔 피켓과 깃발을 흔들자. 그 네모난 정치적 공간을 쥔 손은 곧 또 다른 손을, 조금은 다른 세상을 끝내 불러낼 것이다.



1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 퀴어- 네트워크’는 “여성 혐오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광장에서 벌어지는 소수자 혐오에 맞서기 위해 열린 연대체”이다. 총 9개 단체(FDSC,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불꽃페미액션, 언니네트워크, 페미당당,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뉴그라운드)가 운영진으로 행동하고 있다. 2024년 12월 22일 접속, 출처.

2 당연하지만 여기서 ‘누구나’는 차별과 혐오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 한정된다. 이 맥락에서 연대는 소수자 당사자가 작업한 서체나 오픈소스 서체를 활용하기를 권하며, 성범죄자로 알려진 창작자의 작업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2024년 12월 22일 접속, 출처.

3 최하얀, 「이 사람들 궁금했죠?…아무 깃발 대잔치!」, 『프레시안』, 2016년 12월 31일 자, 출처.

4 Karen A. Foss, Sonja K. Foss, Cindy Griffin, Feminist Rhetorical Theories(Long Grove: Waveland Press, 2006), 60.

5 이봉지, 「엘렌 식수와 여성주체성의 문제」, 『한국프랑스학회』 47 (2004), 245.

6 그러나 드 로레티스는 ‘퀴어’라는 용어가 주류 기관과 기성 체제에 점령당했다고 주장하며, 3년 만에 이 용어를 포기했다. Zach Blas, “Queerness, Openness”, Leper Creativity: Cyclonopedia Symposium(New York: punctum books, 2012), 101.

7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 출구』, 박혜영 옮김(서울: 동문선, 2004), 36.

8 2024년 12월 4일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사퇴 촉구 탄핵 추진 비상시국대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대표 박경석에게 건넨 말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12월 3일은 세계장애인의 날이기도 하다. 올해 전장연은 장애인권리법안 제·개정 및 장애인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하기 위해 국회에 모였고,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에는 비상시국대회에서 장애인 권리를 약탈해 온 윤석열의 탄핵을 촉구했다. 2024년 12월 24일 접속,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