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관 바깥으로

김여명

“우리는 어떻게 태어날지 모르고 태어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든 패가 ‘꽃놀이패’일 수도, ‘개패’일 수도 있다. 사회계약론의 기본 아이디어다. 내가 어떤 위치에서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면, 어디에서 시작해도 불리하지 않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정을 원한다. 문제는 이미 불공정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다. 우선 내가 경험하는 불공정을 모두가 말해 보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남들이 뭘 경험하고 사는지를 알아야 무엇이 특권이고 차별인지 알 수 있다. 온통 ‘나’뿐인 진공관의 세계 안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옳은 주장을 할 수도 없다.” 홍혜은, “[시선] 당사자성이 다가 아니라는 말”, 「경향신문」, 2022년 04.16 접속, 출처.


앱스는 예술과 접근성을 이번 호 주제로 마련했다. ‘배리어 프리(barrier-free)’란 장애인 및 고령자, 임산부 등의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 생활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인 장애물이나 심리적인 장벽을 없애기 위해 실시하는 운동 및 시책을 뜻한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관습적 배리어에서 더 나아가 지식적 차원, 당사자성, 관객이 예술이 창출하는 의미로 접근하는 방법 등을 폭 넓게 다루고자 했다. 누군가에게는 휴식과 향유를 위한 미적인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치열한 전쟁을 해야 하는 정치적 공간이다. 이러한 괴리에 어떻게 접근해 볼 수 있을까. ‘본인 일이나 잘해’ 같은 가르기에 맞서 최소한 막다른 길을 표시해 보자는 마음으로 이번 호를 엮는다.


유진영은 접근성 문제의 당사자성과 비당사자성 사이의 곤혹과 괴로움을 솔직하게 털어 놓으며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된 낡은 가치관을 지적한다. 황재민은 도시 내 존재하는 작은 전시 공간들의 물리적 접근성에서 출발해 접근성과 예술, 환경의 삼각형을 그려 놓고 그 중앙에 실천이라 쓴다. 정서재현, 김얼터, 이지우는 비슷한 문제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를 보여 준다. 정서재현은 회화와 그를 온전히 번역해내지 못하는 대체 텍스트의 문제를 다루면서 사례들을 성실하게 살피고 ‘옳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김얼터 또한 ‘옳게’ ‘본다’는 것을 질문하지만, 전시 안에서 현실을 형성하는 규칙들이 비틀리는 역학을 탐구함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규범을 바꾸는 장소로서의 전시 개념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지우의 글은 ‘아세믹 라이팅(asemic writing)’이라는 흥미로운 케이스로부터 현실을 충분히 지시하지 못한 채 흘러넘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고민한다.


마지막으로, (lock with ink pen)과 🥠를 소개한다. 두 코너는 abs의 고정 코너로, 이번 호에는 박민영과 임승태가 함께 한다. (lock with ink pen)에 참여한 박민영의 글은 작가가 지난 전시에서 발표한 작업들을 토대로 접근성을 고려하는 창작자가 제작한 체크리스트와 전시 중 분투해 온 것들의 목록을 공유한다. 🥠에서 임승태는 연극에서 수어 통역자들이 공연의 일부로 포섭되며 발생하는 미적 효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막다른 길을 표시한 이 지도가 갈래길에 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