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거세게 내려 우산이 무용지물인 날이었다. 중계역에서 내려 옥수수를 판매하는 작은 가판대를 지나 여러 조형물이 같이 비를 맞고 있는 것을 보니 올바르게 온 것이었다. 자동문으로 들어가자 빗물투성이인 팔 위로 찬 에어컨 바람에 몸이 절로 떨렸다. 짐을 정리하고 핸드폰 하나만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가볍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 눈으로 확인하니, 아래에는 “조각충동”이라고 적힌 발 매트가 전시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신발의 물기를 발 매트에 문대며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서 조각을 입어봤다. 행거에 옷가지가 걸려 있는 것처럼 전시된 우한나의 작품 중 두 점은 착용해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전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작품을 몸 위에 감고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벽을 지나자 바닥과 세 벽면을 가득 메운 최하늘의 〈강철이〉가 눈길을 끌었다. 벽과 바닥에는 시트지가 격자무늬로 붙어있었고, 하트와 번개 모양 혹은 으스러진 스펀지가 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 뒤로는 금속으로 만든 물결과 용솟음치는 듯한 형상이 보였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작품 반대편에는 단순한 시멘트로 만들어진 비석 위에 QR 코드가 하나 찍혀 있는 〈백좌용비석〉이 이를 마주 보고 있었다. <백좌용비석> 위로 핸드폰을 들이밀자 현실에서 보이지 않았던 용이 스크린 위로 나타났다. 우한나의 작품을 몸에 감싼 채 〈강철이〉와 〈백좌용비석〉 사이에 끼어있는 나의 몸은 조각의 연장선이 된 것만 같았다.



통상적으로 조각은 삼차원 예술 작품이고, 전시실에서 만질 수 없는 것이어서 오래도록 우리는 눈으로만 조각을 만지곤 했다. 그런데 전시에서 본 작품들은 마치 이 조각이라는 개념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이는 전시의 서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각충동⟫은 서문에서 동시대 조각이 “마치 블랙홀과 같이 조각의 주변부를 빨아들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어 무엇이 조각인지 알 수 없게 된 상황”에 처해있고,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을 “해체된 조각 개념이라는 텅 빈 공간을 향한 충동”이라고 소개했다. 이처럼 전시는 동시대 조각을 ‘블랙홀'과 ‘충동'이라는 두 키워드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전시가 말하는 ‘충동’이란 무엇일까?
‘충동’1에 대한 많은 논의를 촉발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삶충동(sex drive)과 죽음충동(death drive)에서 이 질문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에로스로 일컬어지는 삶충동은 인간에게 쾌락을 주는데, 이는 자기 보존을 추구하거나 어떠한 전체성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전체성을 만들고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삶충동을 ‘묶기'(binding)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에게 불쾌감을 주지만 어떠한 행위를 반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반복 강박’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수치스러운 일을 머리 속에서 되풀이하는 일은 나를 괴롭게 하지만 이를 밤마다 하는 것이 반복 강박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행동을 죽음충동으로 설명한다. 죽음충동은 자기 파괴 혹은 긴장의 완화 및 제거를 추구하는 것이며, 기존의 것을 파괴 및 해체 한다는 점에서 ‘풀기'(unbinding)라고 표현할 수 있다.2
다시 ⟪조각충동⟫으로 돌아가자면, 전시 속 작품들은 통상적으로 조각의 주변부로 여겨졌던 것들을 빨아들이고 조각의 개념을 풀고 해체하고 있다. 그렇지만 죽음충동이 대답해주지 않는 것이 있다. 죽음충동으로서의 조각,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만 속은 텅 빈 블랙홀과도 같은 조각이라는 설명이 해결해주지 않는 질문이 있다. 어쩌다 조각이 모든 것을 흡수하게 되었지? 어쩌다 우리가 여기에 왔지? 블랙홀이라는 조각의 은유에 조각의 시간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잃어버린 조각의 시간을 찾기 위해 전시실로 돌아갔다. 무대 형태의 조각에서 내려와 두 면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 목을 빼고 바라봤다. 몸을 돌려 다음 작품을 관람하려 하니 작품의 정면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 상자 위에 무언가 올려져 있었고, 작품의 정면으로 가기 위해 작품의 왼쪽 뒤편을 따라 걸었다. 흰색 재료의 끄트머리가 둥글려진 동굴 같은 게 어느 산의 약수터에서 본 불상의 광배 같다고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게 산이었던가, 절이었던가 고민하다 작품을 끼고 도는데 갑자기 낯익은 기억이 하나 피어올랐다.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기억이 명료하진 않지만, 수학여행에서 거대한 조각 작품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작품은 너무 커서 옆에서 한눈에 보이지 않아 그를 중심으로 돌았다. 공기는 바깥보다 차서 살 끝이 서서히 일었고 공기의 냄새마저도 어두컴컴한 게 평소에 맡던 것과는 달랐다. 십여년 전에 마냥 위를 쳐다보며 주변을 돌았던 그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기억을 더듬다 보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한 작품의 정면에 도착해 있었다. 정면에서 확인하니 오제성의 〈Index_초전리 미륵불〉은 미륵불과 미륵불의 거푸집들이 놓여있는 작품이었다. 어설프게 본 이미지를 보고 작품의 뒤편을 돌며 발자국을 찍자 아주 오랜 추억, 이 동일한 순간이 멀리서 찾아와 내 깊숙한 곳으로부터 옛 순간을 부추기고 움직이고 끌어올린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오랜 기억으로부터 조각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잊혀진 조각의 시간이 내 발 앞에서 솟아나는 듯했다.*


잃어버린 조각의 시간을 찾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전시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문이삭의 작품은 낯익은 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직육면체의 형태로, 가장자리에는 기둥 혹은 사람의 팔과 같은 형상들이 조합되어 붙어있다. 〈A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 문 이후〉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문이삭의 작품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70-1917)의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 (1880-1890경)이라는 기억을 꺼낸다. 로댕의 〈지옥의 문〉과 유사한 형상을 알아차리고 나면 익숙한 조각의 이야기, 새로이 조각을 이야기해야했던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1941-)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크라우스는 로댕의 〈지옥의 문〉과 〈발자크(Monument to Balzac)〉(1898)을 근대 조각의 시작으로 보았다. 이 두 작품을 포함한 그 이전의 조각 작품들은 주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제작되었고, 조각 작품들은 완성되고 나면 가야 할 곳이 명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옥의 문〉 또한 프랑스 장식미술박물관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 측이 의뢰한 조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장식미술박물관을 건립하기로 한 계획이 틀어지면서 조각은 갈 곳을 잃었고3, 로댕은 〈지옥의 문〉의 부분들의 구성을 계속해서 변경하다 고정된 형태 없이 ‘미완’으로 남겨둔 채 생을 마감했다. 〈지옥의 문〉은 갈 곳도 없이, 작가가 보증하는 ‘완성된 형태’도 없는 채로 남았다. 작품은 작품을 반복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주조틀과 함께 작품을 처음 의뢰한 프랑스 정부의 손에 남겨졌다. 작품에 대한 권리를 가진 프랑스 정부는 〈지옥의 문〉을 이루는 로댕의 조각 작품들의 복제본을 12개로 제한하여 이를 판매하였고, 한국, 일본, 프랑스 등 각지에서 로댕의 작품들은 복제본이면서도 원본인 채로 관객들에게 전시되었다.4 원본이면서 복제본이고, 갈 곳이 없어진 〈지옥의 문〉은 기념비로서의 기능을 잃었지만, 미술관에서 작품으로서 전시되면서 근대 조각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19세기 말에 조각들이 갈 곳을 잃었다면, 오늘날에는 이미지들이 갈 곳을 잃었다. 원본도, 원래의 맥락도 잃은 빈곤한 이미지들은 구천을 떠도는 망령처럼 인터넷과 여러 매체를 돌아다닌다.5 전통적으로 조각가는 점토로 살을 붙이거나(modeling) 재료를 깎아내어(carving)를 통해 자신이 구상한 형상을 작품으로 구현했다. 따라서 작품의 형상, 질감 등은 작품에 고유한 것이자 작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작품에서는 원본의 아우라가 드러났다. 그러나 문이삭은 갈 곳이 없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이미지 데이터를 사용하여 조각을 만든다. 문이삭은 인터넷에 3dx max 오픈 소스로 공유되는 유명 작품들의 모델을 다운받아 소프트웨어에서 변형시켜 작품을 제작했다.5〈A’s show must go on: The Original Form〉은 소프트웨어에서 형태를 만든 뒤, 아이소핑크, 스펀지 등과 같은 재료를 소프트웨어에서 만든 형태에 따라 열선으로 깎고, 재료를 그 위에 덧붙여 표면을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A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 문 이후〉는 〈A’s show must go on: The Original Form〉을 비롯한 다른 작업을 재구성하여 제작한 것이다. 문이삭의 작품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사용함으로써 원본과 복제의 개념을 해체하는 것은 물론 데이터의 공유를 가능하게 한 네트워크를 암시한다.
로댕의 작품이 선형적인 시간이라면, 문이삭의 작품은 비선형적인 시간을 제시한다. 로댕의 경우 점토로 형태를 만든 뒤, 이를 활용한 주조틀을 제작하여 작품을 반복하여 만들어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살 붙이기와 주조틀이라는 순서가 있어 선형적인 시간을 드러낸다. 그러나 문이삭은 오픈 소스 모형을 다운로드해 소프트웨어에서 모형을 변형하고 언제든지 뒤로 갔다 앞으로 가며 작품을 변형할 수 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 돌아가고, 이후에 과거로 넘어갈 수 있는 그의 제작 방식은 비선형적인 시간을 암시한다. 문이삭의 조각은 스크린을 떠나 물질적인 형태를 가진 이후에도 재구성되어 〈A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 문 이후〉로 전시되었다. 로댕의 문을 기점으로 조각들이 고정된 장소에서 풀려났다면, 문이삭의 문은 이제 조각의 시간과 공간이 더 이상 선형적이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우연히도 두 문은 조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변화할 때마다 우리 앞에 열려, 이것들을 어떻게 생각해볼 것이냐고 질문한다.


계단을 올라가 보면 황수연이 또 다른 기억을 꺼내고 있다. 황수연의 세 조각은 멀리에서 보면 견고하고 단단한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제작한 것처럼 보인다. 〈소파쥐〉에서 맨질맨질한 대리석 조각들이 흰색 소파 위에 이리저리 쌓여있고, 한두 개가 마치 소파에서 떨어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그 옆에 있는 〈피셔 1, 2〉는 건축물에서 자주 본 것 같은 화강암 재질로, 박쥐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낮은 와이어 펜스로 하나로 묶여 있다. 관객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동선을 가운데에 두고 두 작품의 맞은 편에는 〈이펙터〉가 전시되어 있다. 〈이펙터〉는 기다랗게 옆으로 뻗어 있으면서도 안으로 움푹움푹 패여 있고, 위에는 다이아몬드와 유사한 형태 각각 놓여있는 작품이다. 기하학적이면서도 유기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 이 세 조각에 더 다가가 보면 조각의 거짓말이 탄로 나고야 만다. 이들은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프린트된 종이를 이어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작품에 다가가며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피셔 1,2〉 앞에 놓인 구두와 나의 발을 번갈아 보다 작품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이펙터〉, 〈피셔 1,2〉, 〈소파쥐〉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ca. 1525-1569)의 〈맹인의 우화(The Blind leading the Blind)〉(1568)를 모티브로 한 종이 조각이다.”
브뤼겔의 〈장님 우화〉7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작품으로, “장님이 장님을 이끈다면 모두 구렁에 빠질 것이다”라는 성경의 한 구절을 회화로 그린 것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가인 브뤼겔은 주로 속담이나 농민의 생활을 그림으로 그렸다. 원근법을 고려해 그려진 장님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지팡이를 앞 사람과 같이 쥐거나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의지하여 걷는다. 그러나 가장 앞쪽에서 이들을 이끌던 사람은 이미 구렁텅이에 빠져 있고, 바로 뒤에서 그를 뒤따르던 사람 또한 곧 넘어질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어 성경의 구절을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긴다. 게슈탈트 심리학자인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 1904-2007)은 이 작품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으로 훑어 작품 속 형(form)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 원리에 따라 작품의 의미를 해석한다. 아른하임은 이 작품이 움직임을 연속 촬영하여 망막에 맺힌 잔상으로 인해 실제로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는 동영상 혹은 영화의 원리를 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왼쪽에서부터 고개를 들고 직립하며 걷던 사람들은 아슬아슬해 보이고, 이내 완전히 균형을 잃고 구렁텅이에 빠지고야 만다. 아른하임은 브뤼겔이 ‘장님이 장님을 이끈다면 모두 구렁에 빠질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을 눈의 움직임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한다.8
황수연의 작품은 외관상으로 로댕의 작품과 유사해 미술 담론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문이삭의 작품과 다르게, 브뤼겔의 작품과 겉으로 유사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황수연 작품과 기억으로 들어가 보자. 황수연은 이전 작품에서 얇은 종이 혹은 자꾸만 흩어지는 모래와 같은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물성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황수연은 모래를 그러모아 단단하게 뭉쳐 무거운 작품을 만들어내거나9, 얇고 예리한 종이를 작가가 연필로 빽빽하게 색을 칠해 재질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했다.10 이렇게 변화된 물성에는 오래도록 종이 위를 연필로 그었던 작가의 시간이 쌓여있다. 그러나 황수연은 이번에 자신의 시간을 쌓지 않고 프린트하여 종이를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둔갑시켰다. 〈소파쥐〉, 〈이펙터〉, 〈피셔 1, 2〉에는 전통적인 조각을 깎을 때 확인할 수 있는 암석의 시간도, 황수연의 이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만의 축적된 시간도 없다.
황수연이 회화를 조각으로 오마주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의 눈과 손끝은 2차원 평면인 핸드폰 스크린을 오가지만, 우리는 두께를 가지고 삼차원 공간에 발 딛고 살아간다. 이처럼 2차원과 3차원을 오가는 우리는 2차원과 3차원의 관계에 대해 재고해볼 수밖에 없다. 아른하임이 해석한 것과 같이 브뤼겔의 작품이 눈으로 훑어내리며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황수연의 작품은 몸을 움직이게 한다. 황수연은 세 조각이 서로 맞물리게 되어 있다는 힌트를 주어 세 작품 사이로 관객들을 오가게 한다. 관객은 〈이펙터〉 그리고 〈피셔 1, 2〉와 〈소파쥐〉 주변을 맴돌며 어떻게 이 세 작품이 맞물리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이들을 조합해보며, 쉴 새 없이 목을 움직이고 발을 굴린다. 회화를 조각으로, 2차원을 3차원으로 번역한 황수연의 작업은 눈에 기반했던 의미를 몸의 견지로 가져온다. 황수연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눈을 넘은 사유가 요구되는 2022년에 조각으로 길어 올려 2차원과 3차원을 오가는 우리에게 차원과 시점에 관해 묻는다.
우리는 ‘조각이 어쩌다 여기에 왔지?’라는 질문을 안고 전시 속 작품들을 배회하다 문이삭의 작품과 황수연의 작품을 만났다. 문이삭의 조각은 동시대 조각이 놓인 조건을 로댕의 조각을 오마주하는 방식으로, 19세기 말과 2022년의 시공간을 통과하여 보여주었다. 또, 황수연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작품을 2022년에 조각으로 번역하여 이차원과 삼차원의 관계를 재고하게 하였다. ⟪조각충동⟫은 동시대 조각이 블랙홀같이 주변부를 빨아들인 조각의 죽음충동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전시는 ‘묶기'를 제시하지 않고 슬그머니 ‘충동'과 ‘블랙홀'이라는 말로 도망가버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각충동⟫은 개별적인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전시라는 사실이다. 수많은 동시대 조각 작품 중 선택하여, 이를 각 전시실과 공간에 알맞게 배치하여 전시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모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묶기'를 전제한다. 위에서 살펴본 두 작품은 과거의 작품을 오마주하여 지금 여기의 맥락으로 시공간을 통과하여 보여주며 ⟪조각충동⟫이 느슨하게 두고 간 매듭을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품들이 끌어올린 시간이라는 끈을 잡고, 동시대 조각을 엮어 올린다면 잃어버린 조각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프로이트가 독일어로 쓴 글은 여러 국가에서 번역되었다. 그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대표적인 번역가 제임스 스트래치(James Strachey)는 프로이트가 ‘Instinkt’과 ‘Trieb’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것을 보고 두 단어 모두 영어 단어 ‘’instinct로 번역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를 이어받아 ‘본능’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프로이트가 조금 더 생물학적 본능을 말할 때는 ‘Instinkt’를 사용하고, ‘trieb’는 생물학적 본능이 아닌 것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두 단어를 구분하여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영미권에서는 ‘Instinkt’를 ‘instinct’로, ‘Trieb’를 ‘drive’로 번역하고, 한국에서는 ‘본능’과 ‘욕동’ 혹은 ‘충동’으로 번역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이러한 구분이 지켜지지 않고 연구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여전히 영어 단어로는 ‘impulse’, ‘drive’, ‘instinct’가, 한국어로는 ‘본능’, ‘충동’, ‘욕동’ 등이 혼용된다. 본 글에서는 전시 ‘조각충동’과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 ‘Trieb’를 ‘충동’이라고 표기할 것이다.
2 “Eros”, Oxford Reference, 2022년 8월 15일 접속, 출처. “death-drive”, Oxford Reference, 2022년 8월 15일 접속, 출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유명한 마들렌 일화의 대목을 오마주한 문장이다. 이 대목에서 모든 의욕을 잃은 마르셀은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서 먹으면서 느낀 맛과 홍차에 떠오른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과거의 추억을 비의지적으로 떠올리기 시작한다. 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 추억, 동일한 순간의 견인력이 아주 멀리서 찾아와 내 깊숙한 곳으로부터 부추기고 움직이고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는 옛 순간이, 내 선명한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옮김(민음사, 2012), 86-91.
3 Rosalind Krauss, “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 October, 8 (1979), 33-34.
4 Rosalind Krauss, “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 Postmodernist Repetition,” October, 18 (1981), 47-48.
5‘빈곤한 이미지’는 미디어 예술가, 비평가 그리고 이론가로 활동하는 히토 슈타이얼의 개념이다. ‘빈곤한 이미지’란 인터넷 상에서 돌다 해상도가 낮아진 이미지를 가리킨다. 원본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 일회성과 같은 가치는 잃은지 오래인 이러한 이미지들은 인터넷에서 무수한 맥락에서 사용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미들을 상실한다. 이처럼 이미지의 본래 의미가 떨어져 나가고 무수히 의미가 덧붙여질 수 있는 것은 이미지가 유통되는 인터넷, “파일과 공유 소프트웨어, 편집 소프트웨어, 네트워크의 물질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한 더 심화적인 논의와 연관된 슈타이얼의 작품 〈November〉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김지훈,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포스트인터넷」, 『현대미술학 논문집』, vol. 21, no. 2 (2017), 59-63.
7 작품은 저작권의 문제로 다음 url을 참조. 출처.
8Rudolf Arnheim, Art and Visual Perception: A Psychology of the Creative Ey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4), 8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