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에 대해 말하기와 그 어려움
잠시 내가 조각에 대한 전시를 구상한다고 생각해보았다. 예술가가 아름답게 만들어낸 덩어리를 모아 놓고… 일단은 그것을 위한 서문을 쓴다. 글은 아마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지금 조각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할 포스터(Hal Foster, 1955-)는 『소극 다음은 무엇?(What Comes After Farc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순히 조각이 아니라 조각이 아닌 것 또한 포괄하려는…”
쭈뼛거리는 문장이다. 어쩐지 나는 “조각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선언하는 것이 망설여져 눈치를 본다. 그리곤 애매한 단어와 문장을 잘 알려진 레퍼런스에 기대 놓으며 도망칠 수 있는 구석을 파놓으려고 한다. 곤욕스러운 일이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서문을 쓰는 과정에서 참고 자료로 찾은 몇 건의 글이 상상 속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시각문화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역으로 기존에 ‘조각’이라 불리던 형태의 작품, 3차원의 공간 안에서 하나의 덩어리(mass)로 존재하는 작품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질문해보게 되었다.”1 (강조는 인용자)
“이는 조각의 단편들에 대해 정의하기보다는 조각적인 것에 균열을 가하며 진행형인 일련의 회상을 느슨하게 조망해보는 시도일 것이다. 나아가 “나, 조각을 한다!”고 거리낌 없이 외칠 수 있는 젊은 작가들이 수면으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2 (강조는 인용자)
위의 두 인용구는 2017년 두산갤러리에서 열렸던 《사물들: 조각적 시도 Things: Sculptural Practice》를 둘러싼 기획자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두 글 모두 조각이라는 범주를 새로이 정의하거나 주장하기에 앞서, 해당 범주의 전모와 정체를 보다 조심스럽게 살피고자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고자 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여기에선 어떤 망설임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 망설임은 조각 전시를 고민하고 있는 상상 속의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조각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으며, 이 어려움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간 공통된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나의 궁금증은 다음과 같다. 어째서 조각을 말하는 것은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까?
질문을 검토하기 위해서,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1941-)의 기념비적인 글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1979)으로 돌아가 본다. 그는 하나의 문제를 지적하며 글을 연다. ‘조각’이라는 범주를 초과하는 확장된 작업이 등장하고 있으나, 기왕의 비평이 그것을 계속해서 조각과 같은 전통적 매체의 범주 속으로 우겨 넣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화되는 매체를 ‘조각’으로 소급하려는 역사주의는, 새로운 것을 익숙한 것으로 제한하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작업으로부터 발생하는 풍부한 차이를 완화시키는 안전 장치가 된다. 그러므로 새로이 등장한 작업에 조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기보단, 조각이라는 개념을 다시 사고하는 것이 적절하다. 조각은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개념이며, 필요하다면 새로 쓰여야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3
이어서 크라우스는 조각이 특정한 물질이나 범주가 아닌, 내적 논리(internal logic)와 자체의 규칙(own set of rule)을 가지고 있는 추상적 개념이 될 수 있으리라 주장한다. 이 ‘조각의 논리(The logic of sculpture)’는 곧 기념비의 논리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조각은 형상적이고 수직적인 것으로써 실제 장소와 재현적 기호를 중개하는, 재현과 표지하기(marking)의 논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념비의 논리와 조각의 논리는 19세기 후반, 오귀스트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1917)의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 Les portes de l'enfer)〉(1880-1890)과 〈발자크(Monument to Balzac)〉(1898)와 함께, 기념비가 되기로 예정되었던 해당 조각들의 실패와 함께 분리되어 버리고 마는데, 모종의 해프닝으로 인해 기념비로 기입되지 못했던 근대 조각은 자신의 논리를 부정성의 조건으로부터 찾으며 의도치 않은 자율성을 얻게 된다. 실제 장소와 재현적 기호의 중개물이었던 조각은 이제 “장소없음, 고향없음, 공간의 완벽한 소실”이라는 부정성을 경유해 추상성과 자기-지시성을 갖는 모더니즘 매체로 거듭난다. 그런데 부정성을 자신의 내적 논리로 취하며 자율성을 얻은 조각은 이후 점점 더 순수한 부정성으로 경험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크라우스는 조각을 “건축이-아닌-것(not-architeture)”, 또한 “풍경이-아닌-것(not-landscape)”으로 재정의, ‘논리적으로 확장된 장’을 소묘해낸다. 이 과정에서 예의 ‘기호 사각형’이 도식화되는데, 이 도식 속에서 조각은 특권적인 하나의 닫힌 범주가 아닌, 여러 기호적 가능성 중 하나로 평등해질 수 있다. 조각이라는 개념을 추상화하고 부정성을 자율성의 조건으로 판단, 조각의 역사를 재검토한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 이후, 확장된 작업을 ‘조각’으로 소급시키는 비평은 불가능 해진다. 조각은 이제 보다 더 적절하고 유용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으며, 그 이름은 ‘조각’이 아니다.4

이와 같은 이론적 작업은 이후 ‘매체’를 역사주의적인 것으로 포섭하지 않되 개념화하는, 포스트-매체(post-medium) 이론으로 연결되는 듯 보인다. 크라우스는 『북해에서의 항해(A Voyage on the North Sea)』(1999)에서 모더니스트 구조 영화를 탐구하며, 필름이라는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가 갖는 집적 조건(aggregate condition)의 복합성과 함께 물리적인 지지체의 물질적 본성들과는 구분될 수 있는 매체 개념이 재창안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5 여기서 ‘내적 논리’, ‘자체의 규칙’, ‘논리적으로 확장된 장’ 등의 이름으로 소묘되었던 매체의 추상화 조건들은 ‘관습’ 혹은 ‘변별적 특정성(differential specificity)’과 같은 특정한 개념으로 다시 쓰인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조각’이라는 명명은 정말로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매체 특정성’의 환원적 구조를 “한 매체 안에 겹쳐진 관습”들의 ‘재귀구조’로 대체할 수 있다면, 굳이 역사주의적 뉘앙스를 떨치기 어려운 조각이라는 개념, 그리고 해당 개념이 선 그었던 모종의 한계를 반복할 필요는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6 더 나은 범주들에 의해 조각이라는 특정한 범주는 상대화된다.
앞서 상상 속의 내가 차마 떨쳐 내기 어려웠던 망설임은 이와 같은 이론적, 비평적 배경을 계속해서 되새김질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조각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전통적 매체, 이를테면 회화가 공유하는 어려움이기도 할 텐데, 더 나은 매체 개념을 전개할 수 있는데 굳이 과거의 매체로 돌아가야만 하느냐는 비판은 전통적 매체에 복고주의의 혐의를 덧씌우고, 비평 혹은 기획의 경우 이에 맞서 모험과 도약을 주장해내야 하기에 어느 정도 망설임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여기서 누군가는 조각을 주장하기 위하여, 포스트-매체 개념에 내재된 또 하나의 이론틀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크라우스는 포스트-매체 조건을 가능케 하는 계기 중 하나로 ‘구원적(redemptive)’ 맥락을 꼽은 바 있다. 이 개념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사유로부터 끌어온 것인데, “테크놀로지 탄생의 화석으로서의 주어진 테크놀로지 형식의 유행이 지난 단계가 그 테크놀로지 자체의 구원적 이면을 계시할 수 있다는 깨달음”7을 말한다. 하나의 테크놀로지적 지지체 이면에는 ‘구원적 가능성’이 코드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해당 지지체가 전면화된 순간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유행이 지나고 ‘쇠퇴’하는 그 순간 역설적으로 드러나며 포스트-매체 조건을 가능케하는 “매체의 재창안(reinventing the medium)”을 일구어 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예의 ‘구원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조각과 같은 전통적 매체에서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매체를 역사주의적인 ‘매체’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시대가 이미 흘러가버린 지금, 조각을, 그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모종의 유토피아적 계기를 회복하여 “재창안” 할 수 있는 시기가 지금 우리에게 도착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크라우스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매체의 재창안”은 단순히 이전의 지지체 형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투사적이면서 기억을 도울 수 있는 표현성의 형식을 전개하는 일련의 관습으로서의 매체라는 관념과 관련이 있다”8고 말이다. 그가 벤야민의 사유 궤도를 따라 구원의 계기를 테크놀로지적 지지체로부터 찾았다는 사실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조각을 비롯한 전통적 매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비평은 해당 매체에 대한 쉽고 빠른 낭만화 기제로 탈바꿈될 위험이 높아 보인다. 이곳은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밀려난 폐허라기보다는 썩은 기둥이 구부러지고 있는 신전 같은 것으로, 똑같이 낡고 썩었을 지라도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전통적 매체는 이미 한번 승리한 적 있는 역사이며 그것의 가능성은 이 사실을 직시한 상태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쇠퇴’할 수 없는 조각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은 마크 피셔(Mark Fisher, 1968-2017)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2009)의 첫 장에서 인용하면서 내게 각인된 장면이다.9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 1961-)이 감독한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2006)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이가 더는 태어나지 않게 된 2027년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세계 각국의 정부 기능이 이미 마비되었고, 혼돈스러운 세상에서는 안락사가 권유되는데, 영화의 초반부, 클라이브 오웬(Clive Owen, 1964-)이 연기한 테오는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미술품 관리 청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촌을 만나고자 한다. 시위대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관리청으로 들어간 순간, 그의 시야에 처음 들어오는 것은 층고 높은 공간에 우뚝 서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인데, 이 인상적인 인용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세계가 쇠퇴하는 그 순간에도 어떤 조각은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각을 말하고자 한다면…
조각을 말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조각’보다 더 나은 개념이 그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계속해서 상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체의 재창안”을 가능케 했던 부정성의 조건이 조각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조각을 말하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이유는, 이와 같은 사유 양식이 기능하고 있음에도 조각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조각’으로 비평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사례는 계속해서 등장하고 그것은 곧 말하기의 필요와 말하기의 망설임이라는 상반된 긴장을 만들어낸다.
다시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으로 돌아가본다. 이것은 포스트-매체 개념을 논의하기 위한 기반 작업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당시 미술의 현행적 맥락을 의식하고 작성된 과도기의 수행이기도 하다. 크라우스가 ‘논리적으로 확장된 장’을 그려내기 위한 ‘기호사각형’을 작성해야 했던 이유는, 해당 글의 서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듯, ‘조각’이라는 개념이 진행 중인 실천이 선보이는 차이를 부당하게 삭제하고 완화시키려는 무거운 중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탓이다. 다만 흥미롭게도, 이젠 상황이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 ‘조각’이라는 호명이 가능했기에 발생했던 문제가 이제 ‘조각’이라는 호명이 불가능하기에 반복된다.
이와 같은 문제적인 반복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비평적 도약이 요구될 것이다. 나는 이 도약 방법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다만 망설임을 감수한 채 조각 말하기의 어려움을 직시하는 최근의 실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고, 그로부터 모종의 계기를 찾아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나는 지난 2022년 5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렸던 《각 (Kak)》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이것이 ‘그럼에도 조각을 말하고자 한다면’, 하나의 참조점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 느끼고 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각》은 전시라는 시공간을 통해 임의적인 조각의 짧은 역사를 설정하고, 그 과정에서 ‘오류’라는 부정적 조건을 찾아낸다. 그리고 둘째, 그와 같은 조건으로부터 조각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장(field)’을 형성한다. 아래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
신지현과 이성휘가 공동으로 기획한 《각》은 “조각”이라는 단어를 절반으로 나누며 시작한다. “조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각”은, ‘조각’을 지시하지만 온전히 지시하지 않는 상태로, 유보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각》이 조각에 대해 보이고 있는 판단 유보의 태도는 신지현의 서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전시는 “그 의미와 범주를 해체, 확장시켜 나아”간 조각의 전사를 의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열린 개념으로서의 조각을 아우르는 의미를 갖는”10 시공간이 되고자 한다. 《각》은 조각이 포괄할 수 있는 확장된 의미에 의지하지만, 조각이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기보다는 어떤 긴장을 포함한 채 유지되기를 바라는 듯한데, 비유하자면 《각》은 조각의 ’열린 면’과 ’닫힌 면’을 연결하는 하나의 경첩으로 기능하고자 한다. 여기서 ‘열린 면’이 전시가 적극적으로 포함한 진행 중인 실천들의 꾸러미라면, ‘닫힌 면’은 그와 같은 실천의 자율성을 제한적으로 뒷받침하는 역사의 꾸러미가 될 것이다. 잠시 기획의 말을 살펴보자.
“작품이, 작가가, 그리고 전시가 위치하는 시공간적인 좌표를 자꾸 가늠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고 방향키를 잡느냐에 따라 전시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고심 끝에 《각》은 출품작들의 타임라인에 집중하기로 하였다.”11
이와 같은 집중의 결과, 《각》에는 특정한 타임라인, “시공간적인 좌표”가 분명하게 기획된다. 전시는 1998년에서 2022년에 이르는 약 25년 간의 시간을 담아내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연보의 첫 줄에는 특정한 이름들이 놓이게 된다. 권오상, 이불, 서도호라는 이름은 《각》이라는 기획을 살피기 위해 무시할 수 없는 방향키로 위치한다.
여기서 권오상, 이불, 서도호, 그리고 그들이 환기하는 시간들, 이를테면 1990년대의 시간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며 소개하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작점에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면, 이불이 다름 아닌 조각가로 위치된다는 점이다. 이불은 흔히 페미니즘 미술 혹은 탈식민주의 미술의 선구자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그 자체의 첨병으로 읽히는 듯하기에, 그를 조각가로 배치하는 것은 흥미롭게 보인다. 그러나 이불이 가진 이질성을 의식하면서도 그를 조각가로 재평가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평론가 안소연은 논문 「설치미술의 국제화 흐름 속 1980년대-1990년대 한국현대조각의 변화」(2018)를 통해, 이불의 작업 전반에서 나타나는 조각적 성격을 검토한 적 있다. 안소연은 이불을 ‘세기말’의 시간 속에서 ‘신세대’ 작가로 활약하면서도 동시에 조각적 조건을 꾸준히 탐구해온 작가로 독해하는데, 예컨대 이불은 1990년 ‘제 2회 한일 행위예술제’의 일환으로 벌인 유명한 퍼포먼스 〈수난유감 -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1990)에서, 기괴한 붉은색 복장을 입고 도쿄를 누볐는데, 이때 사용한 의상은 〈무제(갈망)〉(1988/2011 재제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고 전시장 안에 재배치되며 ‘조각적 오브제’로 기능하기도 했다는 것이다.12


‘1990년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해당 시기가 급격한 전지구화와 더불어 새로운 미술 언어를 필요로 했던 역동적인 이행기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때 ‘새로운 미술 언어’란 “단색화 계열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계열의 리얼리즘으로 양분화되었던 당시 화단의 조류에서 일탈해 오브제와 설치미술을 표방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탈모던을 꾀했”13던 일련의 실천을 일컬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전통적 매체가 부과하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설치 미술의 국제화 과정에 발맞추려는 광범위한 의지가, 그러니까 “확장된 장”을 향한 의지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행기에서, ‘신세대’ 작가인 이불이 온전히 설치 미술로 나아가지 않고 ‘조각적 조건’을 탐구하는 과정 속에 머물러 있었다는 관찰은 흥미롭다. 좌표 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위치되어야 할 개인이 알고 보면 ‘모더니즘’의 축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었다는 회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관찰은 하나의 가설적 가능성을 시사한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는 직선적 서사는 사실 그것을 (말하자면) ‘수입’하는 입장이었던 한국에선 불가능했던 것이며, 그러므로 이 이행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오류와 지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오류와 지연은 다름 아닌 ‘조각적 조건’의 탐구로 나타났다.
평론가 문혜진은 논문 「시대적 거울로서의 틈새공간」에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전환기의 한국 미술을 미술 비평을 경유해 읽어낸다. 그는 여기서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수입이 “부분적 이해와 필요에 따른 오역으로 점철된 (…) 한국미술계에 내포된 특징과 문제들이 압축적으로 투사된 모순의 장”14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호미 바바(Homi Bhabha, 1949-)의 ‘틈새 공간(interstitial space)’ 개념을 빌어 복잡한 문화 번역의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오류와 지연의 순간들을 수행적이고 전복적인 창조적 역량을 갖는 대항적 역사로 다시 쓰고자 한다. 나는 문혜진의 이 인상적인 작업을 하나의 맥락으로 삼고, 그 위에 안소연의 연구를 겹쳐서 또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1990년대의 이행기, “확장된 장” 혹은 ‘설치미술의 국제화 경향’에 호응하지 못하고 자꾸 ‘조각적 조건’으로 미끄러졌던 예의 사례들이야말로, 수행성과 전복성을 갖는 ‘틈새 공간’의 적극적인 예시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나아가 ‘조각적 조건’이라는 ’오류’는 그러니까 ‘쇠퇴’에 준하는 부정성의 조건이기도 하며, 지금, 여기,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조각을 다시 말할 수 있는 비평적 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므로 테크놀로지적 지지체의 ‘쇠퇴’라는 계기가 ‘구원적 가능성’을 길어 올리며 “매체의 재창안”이라는 상황을 만들어냈듯, ‘조각적 조건’의 오류라는 계기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혹은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각》, 또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
앞서 《각》에 담긴 “시공간적인 좌표”를 살피며, 눈에 띄는 예로 이불을 거론하기는 했지만, 사실 전시에는 더욱 시선을 끄는 출발점이 하나 있다. 전시에 포함된 25년의 시간 중 유일하게 90년대에 제작된 이행기의 작업이자 나아가 이젠 정말로 조각의 어떤 출발점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좌표인 권오상이다.
권오상은 1990년대의 작가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보다 정치한 견해가 필요할 것 같다. 다만 여기서는 권오상의 조각이 ‘세기말’을 배경으로, 전통적 매체가 아닌 새롭고 역동적인 미술 언어를 요구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조각’으로 성립해온 예외적 사례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조각은 흔히 사진-조각이라고 불리지만, 말장난을 해보자면 동시에 ‘사진이-아닌-것’이자 ‘조각이-아닌-것’의 이질적이나 동질적인 조합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근대 조각의 존재론을 순수한 부정성으로부터 연역해낸 크라우스의 논리로 보아도 조각이며, 그 이전의 논리로 보아도 조각으로 성립되는, 조각의 기묘한 영역을 점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질적 동질성, 혹은 동질적 이질성은 권오상의 조각을 평가절하하는 논리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평론가 임근준은 권오상의 조각이 한때 “묘사의 의무를 사진에 떠넘긴 편리한 방식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비판적 의견에 부딪혔다고 기록한 적 있다.15 계속해서 크라우스를 인용하자면, 그는 로댕이 조각의 해부학적 깊이로부터 표면 묘사를 단절시키며 자율성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현상학적 판단을 의도하는 조각 언어를 가능케 했다고 평가한 적 있다.16 권오상의 조각이 “편리한 방식의 조각”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형태적인 차원에서 근대 조각을 지시하면서도 표면이라는 자율성의 계기에 사진이라는 외부를 기입하는, 이를 통해 관람자에게 현상학적 판단을 이끌어내긴 커녕 계속해서 미끄러지게 만드는 그 이질성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위와 같은 비판은 조각이라는 흐름에서 사진-조각을 하나의 오류로 지적해 탈락 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글에서는 오류라는 부정성이 또 하나의 계기를 창출해내는 모종의 ‘틈새 공간’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자 한다. 권오상의 사진-조각이 “편리한 방식의 조각”이자 한국 조각사에서 하나의 오류 지점이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역사에 전복적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용한 단절 지점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면, 이와 같은 단절을 통하여 어떤 종류의 또 다른 ‘장’을 전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듯한데, 나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가벼움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가벼움의 장’에서 ‘가벼움’이란 더 이상 무거움의 결여가 아니며, 오히려 무거움이야말로 ‘가벼움이-아닌-것’으로 재배치될 것이다. ‘가벼움’은 권오상이 사진-조각을 구상해낸 초기, 가장 중심적인 모티브로 작용한 언어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가벼움’은 지금 진행 중인 조각 실천이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조형 언어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현재 창작 중인 작가들이 좁은 작업실이나 재료에의 부담, 또는 신체적 한계 때문에 조각의 본래적 언어에 가까운 무거운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벼운 재료를 사용하며, 역사적인 조각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한계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서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권오상의 조각이 지시하는 ‘가벼움’이 대항적 성격을 지녔기에 ‘오류’로 평가 받았다면, 현재 창작 중인 조각 작가들이 갖는 ‘가벼움’은 보다 순수하게 부정적인 조건을 포함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각》의 문제 설정을 통하여, 서로 다른 두 가지 ‘가벼움’을 이어볼 수 있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면, 현재의 실천이 모종의 한계 지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부정적 조건 또한 재사유가 가능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조각’이라는 ‘틈새 공간’에서 말이다.
《각》에서는 유독 가벼워보이는 조각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들은 ‘가벼움’과 ‘가벼움이-아닌-것’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전시 초입을 장식한 차슬아의 〈QUAD ALTER〉(2020)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기리기 위한 제단으로서, 스크린 너머의 게임 속 아이템을 조각으로 다시 만들며 존재하지 않는 무게와 양감을 만들어낸다. 조각은 현실의 것이지만 현실이 아닌 곳에서 기원한다. 권현빈은 스티로폼 조각과 대리석 조각을 함께 놓는다. 무거운 대리석 조각에는 가벼운 이름(〈구름〉)이 딸려오고, 또한 무거운 대리석은 가벼운 스티로폼 이후에 놓이는 것으로 상대화된다. (최소한 나의 경우… 이와 같이 생각했다. 2019년에는 스티로폼 조각을 했는데, 2022년에는 대리석 조각을 만들었다고.) 김인배의 조각은 ‘비조각적’ 재료에 속할 아이소핑크를 존재감 있게 드러내고, 이수경의 부드러운 조각은 옷이 되어 펄럭이다가 땅 속에 묻히며 가벼움을 잃는다. 또 나는 홍자영의 조각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한때 ‘풍경이-아닌-것’으로 파악되었던 조각을 거슬러 올라, 홍자영의 작업은 가짜 풍경을 짓고 짐짓 돌이나 산이나 물인 척 하는데, 시선이 근경-중경-원경으로 이어지는 미니어처로 이입되기를 강제 당할 때 잠시 풍경이 조각인 양 발생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드러나고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는 ‘가벼움’은 무언가의 결여나 부족함으로 보이지 않고, 마땅히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이 ‘틈새 공간’에서는 냉정한 시선에 앞서 도망치듯 과몰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다.

1《사물들: 조각적 시도 Things: Sculptural Practice》(2017) 전시 서문, 페이지 표기 없음.
2 추성아, 「CURATOR'S VOICE, 사물들: 조각적 시도」, 『월간미술』, 2022년 8월 23일 접속, 출처.
3 Rosalind Krauss, “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 October, 8 (1979), 30-32.
4 Ibid., 33-34.
5 로잘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현실문화A, 2015), 32-33.
6 같은 책, 10-11.
7 같은 책, 60-61.
8같은 책, 87.
9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리시올, 2018), 10-11.
10 신지현, 「불확실성의 세계 안에서」, 2022.
11 이성휘, 《각 (Kak)》 전시 서문, 2022.
12 안소연, 「설치미술의 국제화 흐름 속 1980-1990년대 한국현대조각의 변화」,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6 (2018), 248.
13 같은 글, 237.
14 문혜진, 「시대적 거울로서의 틈새 공간」,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1 (2010), 49.
15 김승현, 《지록위마》 전시 서문, 2000, 임근준,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갤리온, 2006), 339-340에서 재인용.
16 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 조각의 흐름』, 윤난지 옮김(예경, 1997), 4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