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보는 그대에게

김여명

동시대에 시를 읽는 일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참고로 나는 정식으로 시를 공부한 적 없으며, 그냥 시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이 글에는 무지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먼저 써 보이면 누군가 바로잡아 줄 것이라는 기대로 임한다. 나에게 시는 (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행간과 자간이 먼 글쓰기를 요구하는 종류의 글이다.


어쨌든, 동시대에 시를 읽는 일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는 물론 우리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글쓰기 도구들이 더 더 더 짧은 글쓰기를 요구하고, 혹은 클럽하우스와 같이 쓰기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다거나, 단 한순간도 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각적 스펙터클 기계가 깊은 읽기를 방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시를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집에는 없는 책장을 생각한다. 시는 책이다. 시가 책의 형태로 유통되기 때문에 시를 읽으려면 책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책장은 우리의 집에 넓은 공간을 요구한다. 책상 위에 가로로 쌓을 곳도 부족해져 바닥에 책을 쌓다 보면, 이 집은 나를 위한 것인지 시를 위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2018년부터 두 번의 이사를 거쳐 버리거나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에 내다 판 책이 거의 백 권에 이른다. 팔면 안 되는 책을 팔아 버려 두 달 뒤 재구매한 적도 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처분되는 것은 시집과 소설 종류다. 나는 문학을 전부 팔아 버리고 알라딘에서 크레마를, 당근마켓에서 킨들을 구매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것은 엄청난 배신이었다. 줄을 치며 읽는 습관이 있는 나에게 줄을 칠 수 없는 이북 리더기는 눈이 그려지지 않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재미밖에 줄 수가 없다. 심지어 전자책 구매 후 시나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다. 시를 읽는 일은, 시를 꾸준히 읽는 일은, 시의 최종적 형태가 책이라는 매체로 귀결되는 한, 최소한의 생활 반경 외에 추가적인 물리적 장소를 필요로 하는데, 우리의 주거 환경은 그러한 여유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 읽기가 봉착한 첫 번째 난관이다.


시 읽기가 봉착한 두 번째 난관은, 시가 동시대의 무드나 속도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오글과 중2병, 진지병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그나마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그러한 단어들에 관한 반성적 성찰과 자정의 움직임이 있기는 있으나 조금만 평이한 어조를 벗어나도 그것은 (감성이 아니라) 갬성으로 지목되어 곧 사장되고 만다. (그러나 페이스북의 텍스트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또다른 동시대 무드는 틴더의 인터페이스에서 참조할 수 있다. 거기서 사진 게재자가 직접 작성한 텍스트, 즉 해당 셀피의 긴 캡션은 상대를 오른쪽으로 스와이프할 때 필수적인 요건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버튼 한 번을 더 눌러야 볼 수 있는 추가적인 것이다. 로켓 배송 시대에 먼 자간과 행간을 가지는 글쓰기는, 어느 것이 더 낫고 어느 것은 못됐다의 문제를 떠나 그냥 다른 종류의 인간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시 읽기는, 이번 난관은 시 쓰기에 조금 더 가까운 난관인 것 같기는 한데, 시가 보이는 페이지의 크기가 너무 작아져 버렸거나 너무 넓어져 버린 상황을 모두 의식해야 한다. 시는 물론 언제나 읽기를 요구하면서 보기와 듣기도 함께 요구하는 글이었지만, SNS의 등장 이후의 시들에서는 시를 본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조금 더 명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전히 ‘정식’ 시는 책으로 유통되지만, 트위터의 수많은 시 봇들은 시의 일부를, #시스타그램은 시를 이미지화해 유통한다. 이 과정에서 시의 한 행을 차지하는 문장은 제멋대로 두 행이 되거나, 폰트 크기가 제멋대로 작아지거나 커져 버리고, 특정 문장만이 발췌되어 손가락으로 스프레드(Spread)된다. 필요 없는 것은 핀치(pinch)되어 다시 작은 글자로 돌아간다. 또 시의 장평은 마음대로 늘려지며, ‘ㅏ’의 한 귀퉁이는 열화되어 보이지 않게 되고, 평행선이 아니라 책의 펼침을 따라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온 렌즈로 보여지게 된다. 시의 보이기(to be seen)는 2560x1760px와 320x568px라는 두 해상도 사이에서 요동을 친다. 서두가 길었지만 중요한 것은 시가 읽히는 것만큼, 시가 보거나 듣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2010년대 초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詩)팔이 하상욱의 시는 이처럼 자꾸 벌어지는 시와 세계 사이의 상처를 상당히 봉합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트위터에 들어가기 알맞도록 140바이트를 넘지 않으며,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단번에 읽을 수 있도록 이미지로 만드는 일에도 알맞도록 행이 짧다. 그의 작품이 좋거나 나쁘거나를 평가하는 일을 떠나서, 그의 시가 ‘진짜’ 시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시를 읽는 환경이 도무지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을 후련하게 인정해 버린 시는 내가 기억하기로 애니팡이 처음이다.


그러나 진성 고독 매니아인 나에게 하상욱의 시는 지나치게 즐겁기만 해서, 소위 ‘진짜 시다운 시’에 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진짜 시다운 시 같은 건 사실 없기도 하다. 시의 한계는 어디일까? 특히 시가 마음대로 재단되기 쉬운 온라인에서는? 2020년 온라인을 자기 장소로 사용한 수많은 예술 활동이 있었다. 이 글은 그 중 하나인 시홀을 살핀다. 나는 앞서 시가 읽는 것만큼이나 보거나 듣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글은 시 읽기와 시 보기에 집중하면서 사운드는 조금만 건드릴 것이다.


시홀은 구멍 안의 시들을 총 세 가지로 분류한다. 「귓속말로 읽어주고 싶은 시」, 「오늘 쓰고 버린 시」, 「도망치는 시」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기존의 시가 사용하는 ‘읽기’와 ‘보기’를 이어받으면서 ‘더듬기’, ‘지우기’, ‘떠돌기’ 같은 몸짓으로부터 파생되는 서로 다른 감각을 제안한다.


더듬기

귓속말은 물론 일반 대화와 다른 양상을 가진다. 귓속말은 조금 더 내밀한 대화이며, 이때의 대화는 어깨를 숙이고 손으로 귓가를 가리는 등 혀보다 몸을 더 사용하기 때문에 조금 더 직접적인 피부들의 접촉이고,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숨소리나 호흡에 의미가 투사되는 대화다.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를 보러 들어가는 관객은 가우시안 블러 처리된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는데,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마우스를 중심으로 한 원에 블러 처리가 사라지고 아래에 있는 이미지가 원을 통해 보인다. 그 이미지는 사람의 피부나 털, 귀 같은 기관이 틀림없지만 동시에 사람은 아닌, 마치 사람의 피부를 평면으로 펼쳐 놓은 것 같은 어떤 것이다. 관객은 마우스를 움직여 이 표면을 더듬는다. 술래가 눈을 가리고 숨는 사람은 박수를 치며 따라 다니는 숨바꼭질처럼, 사운드를 따라 이미지를 더듬다가 시 조각을 찾게 된다. 1번부터 11번까지 시 조각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내가 찾은 각각의 시 조각들이 가진 사운드가 중첩되는데, 이는 블러 처리 된 표면 아래 이것 저것을 모아다 망치로 두드려 평평하게 만든 것 같은 이미지와 공명하는 측면이 있다. 어쨌든 이 시 조각을 눌러야 드디어 시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시를 보는 것도 쉽지 않다. 마우스 반경의 투명한 원 때문에 글씨가 자꾸만 가려진다. 결국 관객은 시를 찾기 위해 마우스로 이미지를 더듬었던 것처럼 문장을 더듬어야 하는데, 이때의 더듬기는 역(逆)더듬기다. 문장을 피해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더듬기와 디지털 매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특히 거의 모든 스크린이 터치 기반으로 넘어가면서 이미지는 눈으로 보이기만 한다기보다 손 끝으로 만져지고, 더듬어지고, 걸러지고, 확대되거나 잘리거나 축소된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눈들을 위한 보는 시가 아니라, 손가락 끝을 위한 더듬는 시다. 그것은 언어 너머의 ‘순수’한 세계에서 손으로 방해되고 보이지 않게 되면서 기묘하게도 미술에서 가장 오래된 테마 중 하나를 건드린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화면을 더듬는 우리의 손가락 끝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홀은 데스크톱으로 시 보기를 추천한다. 역더듬기를 구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터치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스크린에는 마우스가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는 역더듬기를 구사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마우스와 손가락의 차이에 관련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지우기

「오늘 쓰고 버린 시」는 화면의 바디 부분에 삽으로 땅을 파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깔려 있고,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시-div들이 널려 있다. 바탕에 있는 이미지를 일정 단위로 분할한 것 같은 각각의 시-div를 누르면 마우스 커서가 빨간색 타원으로 변하고, 이 마우스를 지우개처럼 사용해 위에 있는 이미지를 지움으로써 시의 모습이 드러난다. 지우는 목적이 시를 읽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문장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위주로 지울 수밖에 없다. 이 div에서 나가기 위해 바탕을 누르면 확인한 시-div는 사라져 있고, 파지지 않는 땅을 파는 이미지만이 남아 있다. 「오늘 쓰고 버린 시」는 하나의 사운드만을 제공하고, 보는 사람이 이 사운드를 언제 만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다시 시를 읽는 환경을 환기한다.


우리의 주변은 시집 하나를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상황일까?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그것은 벤야민이 정신 산만한 것이라고 불렀던 환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떤 문장이 다음 줄로 넘어갈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읽는 사람이 거기 머무르기를 선택하거나 더 이상 이 시를 읽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이런 결정은 시가 아주 오래 전 소리내어 읽기를 목적으로 했던 때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시를 시집, 즉 책의 형태로 읽었던 때, 그리고 시를 아무렇게나 절삭해서 읽는 지금 같은 때에 모두 적용되는 생각이다. 이제 시와 시 읽기는 손 쉽게 지워지거나, 취소되거나, 쓰고 버려질 수 있다. 이제가 아니라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종이 시는 조각 조각 잘라져서 인용되고 RT되었으며, 함부로 이미지로 발췌되어 #시스타그램의 재료가 되었다. 사람들이 시를 어떤 마음으로 읽는지 알 수 없으므로, 이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다. (인용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좋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시가 더 이상 하나의 유기체같이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킬러다.


떠돌기

마지막으로 「도망치는 시」는 360도로 시점을 돌려 볼 수 있는 3D 영상이 있고, 시들은 그 세계에 부유 중이거나, 흐르고 있거나, 울룩불룩한 상태로 있다. 하나의 시를 읽을 만한 시간 후에, 누군지도 모를 나는 카메라에 이끌려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시를 본다. 시를 보는 행위와 시가 보이는 것이라는 측면은 특히 「도망치는 시」에서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해체되면서 동시에 대단히 가시화된다. 종이 시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문장 두 개 사이의 거리인 행간과 연 두 개를 구분하는 공백은 중요한 시각적 요소이지만, 「도망치는 시」에서 이런 시각적 요소들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아예 없어진다. 「도망치는 시」는 종이에 가지런히 적히지 않고, 종이를 떠나 떠돈다. 보는 사람은 떠도는 시와 함께 이미지 사이에 이끌려 떠돈다. 시는 심지어는 내 눈을 피해 움직이기 때문에 시는 나를 쫓아오지 않지만 나는 시를 쫓아가야 한다. 이것은 마치 비참한 방식으로 애인을 차 버렸지만 사실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인 감각이다…. 나는 시를 사랑한다. 시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나를 버리지도 않는다. 시는 나를 완전히 가지고 놀 생각인 것이다.


「도망치는 시」는 의미의 측면에서나 문장 형식의 측면에서나 이미지의 측면에서나 모두 도망친다. 그러나 이 도망은 완전히 사라지기를 목표로 하는 도망이 아니다. 이 도망은 붙잡히기 직전의 순간을 계속해서 지연하는 도망이다. 다시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 예시를 생각해 본다. 이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술래를 피해 영원히 숨어 있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붙잡히는 일이라고 한다. 「도망치는 시」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드라마틱한 상황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드디어 시를 볼 수 있는 고정된 시점을 찾았다고 생각하다가도, 그 좌표가 겨우 3초만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화면을 움켜 쥐어 시점을 옮기게 된다. 시는 와중에도 내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쿨한 모습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나 시홀에서 무엇보다 시적인 부분은 메인 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다음 문구다. 서울문화재단에서 돈을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자신이 놓인 상태를 직시하면서, 상냥하되, 품위를 지키면서도, 약간의 시니컬함을 더해, 앞으로 나아가기. 시는 이제 어디로 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