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가 몰랐던 것

한수정

한수정은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에코챔버》(2022), 《비미래》(2023) 등을 기획하였고 제15회와 제18회 부산국제비디오아트페스티벌 게스트 큐레이터로 활동하였다. 믿음, 시간, 심신문제, 동물윤리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현이 엄마라는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흑백으로 된 방에서 감금되어 살던 메리가 어느 날 감금에서 풀려나 천연색의 세계로 나온다. 흑백으로 된 방에서 메리는 흑백의 교과서를 통해 사과는 빨간색이라는 서술을 읽고 빨간색에 대하여 배웠다. 그렇지만 메리는 감금에서 풀려나고, 실제로 빨간색의 사과를 보고 나서야, “아, 이것이 빨간색이구나.”라고 알게 된다. 철학자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 1943-)의 1986년 유명한 논문 「메리가 몰랐던 것(What Mary didn’t know)」(1986)을 각색해 본 사례이다.1 빨간색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메리에게, 빨간색의 물건이라고는 전혀 없는 흑백의 방에서, 어떻게 빨간색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빨간색을 보기 전까지 메리는 빨간색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대체 텍스트(alternative text)를 작성한다는 것은, 감금되어 풀려난 적이 없는 메리에게 빨간색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대체 텍스트란, 시각 장애인들이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고안된 텍스트이다. 이미지를 글로 묘사한 이러한 텍스트는 오디오 형태로 제공되고 이를 통해 시각적인 것은 청각적인 것으로 대체된다. 대체 텍스트는 최근 시각 장애인들이 시각 예술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시각 장애인들의 경우 시각적인 정보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적거나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설명하는 이에게도, 메리에게도 모두 어려움을 야기한다. 설명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메리에게 보이는 것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메리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접근할 수 없는 정보에 대한 믿음을 형성해야 한다.

이 어려움을 고전적인 인식론의 도움을 받아 도식화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건전한 믿음의 경우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A가 p라고 믿을 때,
(1) p가 사실이어야 한다.
(2) A가 p를 믿게 된 과정이 합리적인 추론 과정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A는 B가 자신의 돈을 훔쳤다고 믿는다. 그런데 B가 A의 돈을 훔쳤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이 사실이 아닌 경우). 그렇다면 A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일 것이다.

혹은, A는 B가 자신의 돈을 훔쳤다고 믿는다. 그리고 B가 A의 돈을 훔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A는, 갑자기 지나가던 외계인의 텔레파시 계시를 받아 B가 A의 돈을 훔쳤다고 믿게 되었다((2)가 건전하지 못한 경우). 그렇다면 A의 믿음은 건전하지 못한 믿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대체 텍스트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시각장애인 A는 작품 (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받았다’고 믿는다. 이것이 건전한 믿음이려면,
1. A는 작품 (가)에 대한 사실의 설명을 제공받아야 한다.
2. A는 작품 (가)에 대한 사실의 설명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합리적 추론에 의해 믿게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대체 텍스트를 ‘똑바로 작성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이 명확해졌다. 1. 우리는 작품에 대한 사실의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2. 설명을 제공받는 시각장애인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합리적 추론에 의해 믿게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전혀.

1. 우리는 작품에 대한 사실의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이 조건은 얼핏 생각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작품에 대한 사실의 설명이란, 설명의 진릿값이 참이면 되는 것일 테고, 작품에 대한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면 참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것을 2번 조건과 함께 고려하려면 녹록지 않은 문제가 된다. 2번 조건을 신경 쓰다 보면 작품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묘사(e.g. 빨간색이다)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2. 설명을 제공받는 시각장애인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합리적 추론에 의해 믿게 되어야 한다.

이 조건은 우리가 접근할 수 없거나 어려운 정보에 대해 들었을 때,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신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 있다. 접근할 수 없는 정보의 예로는, “사실 우리 집에 완전히 새로운 원소와 배합으로 만든 신소재 송아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 집을 보여줄 순 없어.”와 비슷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 집’에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리 ‘신소재’에 대해 객관적인 색깔, 질감, 특성 등을 묘사해도 그것이 실재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통상적인 경우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진실한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시각장애인은) 신소재가(빨간색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없고, 무엇을 근거로 빨간색과 자신의 해석을 연결하여 믿음을 형성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단된 경로를 우회하여 정보에 접근할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차단된 시각 경로를 우회하여 다른 경로의 정보를 제공받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우리는 시각 예술 작품 (가)에 대해 시각적이진 않지만 진실된 서술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예술 작품이 매개하는 그 이면의 의미에서 답을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설명하려는 것이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은, 다른 이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 문제를 더욱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궁극의 힌트이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그것은 시각의 외피를 쓰고 있을지언정 그것이 진짜로 전달하려고 하는 바는 다른 데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빨간색의 물감으로 칠해져 있고, 검은색의 동그라미로 그려져 있다는 것 자체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빨간색으로 칠한 동그라미는 그저 기호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sense, significant)는 정작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 의미는 다른 기호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번역은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흥미롭게 느낀 대체 텍스트의 사례는 장애인 작가인 보야나 초클랴트(Bojana Coklyat)와 피네건 섀넌(Finnegan Shannon)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시로서의 대체 텍스트(Alt Text As a Poetry)〉(2020 - 현재)이다.2 이 프로젝트는 이미지를 시로 표현하려는 시도로서, 보야나와 피네건은 하필 ‘시’의 형식을 생각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언어에 대한 집중(Attention to Language) 2. 경제적인 단어 사용(Word Economy) 3.실험 정신(Experimental Spirit). 내 생각에 세 가지 이유 외에도, 다른 예술 매체인 시를 가지고 온 것은 시각 정보 이외의 경로로 예술 작품에 대한 진실된 서술을 제공하는 영리한 선택일 수 있다.

처음에 시의 형식으로 대체 텍스트를 작성하는 시도에 대해 들었을 때 아주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시의 함축적이고 모호한 언어가 객관적이지 않게 느껴졌고, 쉽게 우리의 1번 조건—“작품에 대한 사실의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위배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타협이 필요할지 몰라도, 그것이 시의 언어처럼 대대적으로 1번 조건을 위배하는 수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시의 언어가 1번 조건을 정말로, 그렇게 흉폭하게 위배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실 이 부분이 굉장히 놀라운데, 예술 작품의 의미는 무한히 발생하고 어느 의미가 원의미에 더 가까운지 결정할 수 없다(심지어 원작자조차도). 따라서 시의 언어가 정말로 작품에 대한 참이거나 거짓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이것이 예술 작품이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적 귀결이다. 우리는 이제 1번 조건과 2번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려다,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1번 조건이 2번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른 경로를 모색했고, 그 결과 사실은 1번 조건이 예술 작품이라는 특성 때문에 무효화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귀결이 상당히 비직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음은 내가 이 글의 결론을 내기 전, 이 글의 프로포절을 abs 측에 제공하며 작성한 문단이다.

[…(중략)…만약 A라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으로 B라는 설명이 제공된다면 그것은 대체 텍스트의 취지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대체 텍스트는 과연 A라는 이미지에 대해 B라고 설명하는 일과 다른가? 대체 텍스트는 A에 대한 아주 조금의 설명이라도 제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대체(alternation)’는 ‘번역(translation)’과 조금이라도 유사할 수 있을까?……]

위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A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어느 정도 A적인 속성을 가진, A라고 설명될 수 있는, A와 조금이라도 유사하다는 것이 참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설명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직관에서 이 주제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글의 귀결은 예술 작품에 대한 모든 서술은 진릿값(truth value)을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A라는 작품의 대체 텍스트로서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의 〈황무지(The Waste Land)〉(1922)를 갖다 놓든, 동요 〈나비야〉의 가사를 가져다 놓든, 누가, 그리고 무엇이 그 작품의 진실에 가까운 서술인지 전혀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술사의 일이 예술에 대해 설명하기인 것을 감안하면, 모든 미술사 텍스트는 대체 텍스트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그것의 진릿값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한 작품을 보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가 쓴 서술이다.

“걸어가는 손들, 잠자는 손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는 손들. 범죄자의 것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손들, 그리고 피곤해하는 손들,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손들,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병든 짐승들처럼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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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술을 보고, 당신은 로댕의 〈대성당(La Cathédrale)〉과 이 서술을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는가?


(이미지1) 오귀스트 로댕, 〈대성당〉 중 일부. ©Agence photographique du musée Rodin - Jérome Manoukian.

15년 전 관람했던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형 전시를 기억한다.4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콜라라며 손에 쥐어진 사이다를 마시고, 배를 탄다며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분무기를 맞았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1 Frank Jackson, "What Mary Didn't Know", The Journal of Philosophy, vol. 83, no. 5 (1986), 291-295.

2 시로서의 대체 텍스트(Alt Text As a Poetry). 출처.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보르프스베데, 로댕론』, 장미영 옮김(책세상, 2000), 151.

4 출처.